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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32

5.조선전기 성곽 축조와 공방전 양상(2) 조선은 16세기 말 해양세력 일본의 대규모 침략(임진왜란)을 받고 산성이나 읍성에서의 공방전을 이용해 상륙을 저지하거나 북상을 억제하지 못했다. 특히 읍성은 소규모 왜구의 기습적 노략질에는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같은 전면 침공 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 발발 후 불과 2개월이 경과한 6월에는 평양성을 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명군과 조선군이 공성전을 전개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북쪽에서 남침하는 적을 방어할 때와는 정반대로 공성과 수성이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첫 공방전에서는 성문을 열어 놓고 유인하는 일본군의 대담한 작전에 말려들어 실패하게 된다.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참전한 명군과 조선군의 평양성 공성전은 1593년 1월 다시 전개되었다. 명.. 2020. 6. 30.
5.조선전기 성곽 축조와 공방전 양상(1)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평안도와 함경도의 주요 거점에 축성하여 요새화했다. 그리고 북방민족의 특기인 기병전술에 대응해 장병전술을 발전시켰다. 전 왕조인 고려 말기부터 서남해안 일대에서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으나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부터 주로 연해 지역에 소규모 읍성을 견고한 석성으로 개축하여 대비했으나, 국가적 관심은 여전히 북쪽에 집중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에서 산성은 청야입보 기능을 최우선으로 하며, 인마의 출입이 불편한 지형과 지세가 가장 중요한 입지 조건이었다. 즉 산림이 울창하고 벼랑과 바위가 많으며, 식수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지형이 최적지였다. 이 같은 지형은 수성군에게 은폐와 엄폐를 제공해 주지만 공성군에게도 유리한 조건이다. 따라서 공성부대는 성.. 2020. 6. 26.
4.고려의 성곽 축조와 공방전 양상(2) 강력하던 요나라가 12세기 전반 금(金)나라에 멸망했다. 그러나 금의 세력도 13세기에 접어들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틈에 거란 유족(遺族)이 이탈하자 이들을 지원하던 몽골족이 태도를 돌변하여 1219년 강동성에서 거란 유족과 대치했다. 고려군이 몽골군의 지원을 받아 토벌한 후로 고려는 몽골과 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1231년 몽골군이 귀주지역으로 쳐들어오자 고려군이 귀주성에서 수성전으로 발목을 잡았다. 북로군(제4·5·6군)이 귀주성에서 돈좌됨에 따라 몽골군 본대와 남로군도 남침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고려군은 앞서 1010년과 1019년 귀주성에서 요군을 맞이하여 수성전의 승리와 기습전의 실패를 체험한 바 있다. 출성공격을 자제하고 수성전에 주력한 결과 9월부터 12월까지 세 차례 수성전을 승리로 이끌.. 2020. 6. 19.
4.고려의 성곽 축조와 공방전 양상(1) 고려는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이른바 북진정책을 국시로 내걸었다. 주요 거점에 축성하여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 같은 팽창정책은 평양을 전진기지로 하여 추진되었다.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서경으로 명명하고 정기적으로 국왕이 거둥하여 체류했다. 제2수도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서경성 측방과 전방으로 용강성을 수축하고, 함종·성천·순안·개천 등지에도 축성하여 지역 방위력을 강화했다. 광종 대에는 고려의 북쪽을 압박하는 거란과 여진을 견제하기 위해 전방으로 추진한 서북면과 동북면 지역에 집중적으로 축성한 특징이 있다. 서북면의 청천강 이남에 안융진(평남 안주)을 비롯하여 그 이북지역인 장청진(평북 영변), 운주(평북 운산), 위화진(평북 운산), 안삭진(평북 태천) 등지에 축성하여 중.. 2020. 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