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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13

격동의 19세기 조선(12) - 조선 조정이 수립한 비상대책 프랑스군의 수중에 떨어진 강화 유수부를 탈환하기 위한 대책은 10월 18일 중신회의에서 논의되었다. 각 도에서 모집한 의병을 서울로 집결시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소모사를 전국적으로 파견하는 계획도 세웠다. 이 무렵 통진부도 프랑스 군에게 무혈로 점령당했다. 통진부의 주요 관수품이 약탈당하고 관아가 모두 불탔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 조정이 처음부터 프랑스 함대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함대가 조선 영해를 침범하여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오자 수도 서울에 접근하기 전에 대화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10월 15일 강화성 동문이 프랑스 함대의 침공에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에 무의미해졌다. 이에 조선 조정은 훈련대장 이경하와 총융.. 2022. 10. 25.
제주도 겨울 여행-충장공 양헌수 대장 유적 충장공 양헌수 장군이 병인양요(1866) 직전에 근무했던 제주목사겸방어사 관련 유적이다. 그가 출생한 고향은 경기도 양평군 광탄이다. 그러나 양씨 시조의 탄생지가 제주도인만큼 제주 근무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주도 양씨는 다른 두 성씨인 제주 고씨, 제주 부씨와 함께 '삼성혈'을 시조 탄생 설화의 성지로 공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제주 도민 대부분이 양헌수 목사겸방어사의 윗대 선조와 무관하지 않은 지연적 혈연적 관계로 얽혀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양헌수 자신의 증조부 양세현이 이미 목사겸방어사로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증조부에 이어서 신임 목사겸방어사로 부임한 양헌수가 제주 도민에 대해 느끼는 정감은 분명 남달랐을 것이다. (양헌수 제주 목사겸방어사는 이후로 승승장구하여 병마절도사, 어.. 2021. 2. 5.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10)-되돌아 본 충장공 양헌수 대장의 일생 무인의 문집인 『하거집』의 내용을 통해 느껴지는 저자 양헌수에 대한 인상은 문무겸전한 ‘선비 무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는 조선의 격변기인 19세기를 살았던 전형적인 무인이다. 동시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여 학자적 소양을 풍부하게 갖춘 행정가이기도 했다. 증조부와 조부가 각각 병사와 수사를 역임한 전통을 계승하여 무인의 길로 들어선 후에도 책을 멀리하지 않았고, 다양한 종류의 글을 남겼다. 특히 『하거집』에는 양헌수의 관직생활과 관련된 저술들이 많다. 일반 문인 학자들의 문집과 다른 점이다. 주로 군수․목사(牧使)․병사․어영대장․좌포장․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작성한 글이다. 그래서 행정 문서로서의 성향이 강.. 2020. 4. 10.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9)-무인 양헌수의 독특한 문집 『하거집』 조선시대에 이른바 ‘문집’으로 불리는 개인의 문학 작품집은 문인 학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따라서 무인의 문집은 매우 드물었다. 양헌수는 유학을 전공하다가 무인이 되었지만 항상 책을 가까이했다. 유학자의 습성을 지닌 무인이었기에 군수․목사․병사․어영대장․좌포장․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하거집(荷居集)』을 남길 수 있었다. 여느 무인들과는 달리 양헌수가 남긴 『하거집』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문무겸전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양헌수가 견지했던 선비로서의 학문적 자세에 대해 영선사로 잘 알려진 김윤식은 ‘무인의 수련을 쌓기 위해 아침에 집을 나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길을 걸으며 『대학(大學)』을 암송하고, 날이 저물어 돌아올 때는 『중용(中庸)』을 외우는 ‘공부벌레’였다고 회고했다... 2020.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