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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6

격동의 19세기 조선(12) - 조선 조정이 수립한 비상대책 프랑스군의 수중에 떨어진 강화 유수부를 탈환하기 위한 대책은 10월 18일 중신회의에서 논의되었다. 각 도에서 모집한 의병을 서울로 집결시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소모사를 전국적으로 파견하는 계획도 세웠다. 이 무렵 통진부도 프랑스 군에게 무혈로 점령당했다. 통진부의 주요 관수품이 약탈당하고 관아가 모두 불탔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 조정이 처음부터 프랑스 함대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함대가 조선 영해를 침범하여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오자 수도 서울에 접근하기 전에 대화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10월 15일 강화성 동문이 프랑스 함대의 침공에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에 무의미해졌다. 이에 조선 조정은 훈련대장 이경하와 총융.. 2022. 10. 25.
격동의 19세기 조선(8) - 정치적 변화, 짧았던 밀월관계 1849년 헌종을 이어 철종이 즉위한 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크게 완화되었다. 청나라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1857년(철종 8)에는 천주교 신자가 13,000여 명에 이르고, 1860(철종 11) 이후로는 18,000여 명에 달했다. 그리하여 1861년에는 서울과 그 부근 지역에 새로운 교구가 설치되었다. 천주교 서적들이 출판되어 보급이 확대되자 궁녀나 왕실 부녀자들도 신자가 되는 사례가 늘어났다. 1863년(철종 14) 12월 고종이 즉위하고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하는 가운데 국왕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의 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주교계와 우호적 관계가 형성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즉 국내적으로는 새 국왕의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강대국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해.. 2020. 9. 1.
격동의 19세기 조선(6) - 조대비 수렴청정과 흥선대원군 예우 새 국왕 고종은 1863년 12월 15일 즉위식이 끝나자 즉위년 첫 업무로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이듬해는 고종 재위 원년이 된다. 즉 유년법 원칙에 따라 즉위년과 원년이 구분되기 때문이다(유월법에 따를 경우는 즉위년이 곧 원년이 된다. 주로 왕조가 교체되거나 반정 등으로 새 국왕이 즉위하는 경우에 유월법을 적용한다). 1864년 1월 2일 대왕대비의 지시에 따라 상호군 이경재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대왕대비 조씨의 측근 세력이 새 조정에 배치되는 첫 사례로 보인다. 7일 호조의 보고에 따라 흥선 대원군궁(大院君宮)의 건물을 신축하고 개축하는 등의 공사비로 1만 7,830냥이 확보되어 공사를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2월 8일 이후로는 전라도 김제·만경·전주·익산의 둔전 조세 중에서 종전대.. 2020. 8. 25.
격동의 19세기 조선(2) - 발톱을 감춘 처세의 달인, 흥선군 흥선군은 철종이 재위(1850∼1863)한 19세기 후반 14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치하에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힘겹게 살았다. 당시 서울 장안의 건달패로 이름을 날리던 ‘천하장안(千河張安)’과 어울려 음주가무로 세월을 보내며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세인들이 흥선군과 어울리며 그의 수족처럼 행동하는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의 성씨를 따서 ‘천하장안(天下長安)’이라고 빗대어 부르기도 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안동 김씨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도가의 문전을 전전하며 몰락한 왕손의 자존심도 버린 채 손을 벌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순조(재위:1801-1834)부터 헌종·철종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집권한 안동 김씨 세력이 철종의 후계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신경이 곤두서 왕손들의 동.. 2020.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