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이른바 북진정책을 국시로 내걸었다. 주요 거점에 축성하여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 같은 팽창정책은 평양을 전진기지로 하여 추진되었다.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서경으로 명명하고 정기적으로 국왕이 거둥하여 체류했다. 제2수도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서경성 측방과 전방으로 용강성을 수축하고, 함종·성천·순안·개천 등지에도 축성하여 지역 방위력을 강화했다. 광종 대에는 고려의 북쪽을 압박하는 거란과 여진을 견제하기 위해 전방으로 추진한 서북면과 동북면 지역에 집중적으로 축성한 특징이 있다.
서북면의 청천강 이남에 안융진(평남 안주)을 비롯하여 그 이북지역인 장청진(평북 영변), 운주(평북 운산), 위화진(평북 운산), 안삭진(평북 태천) 등지에 축성하여 중심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동북면에는 함경남도 영흥의 장평진·화주·박평과 그 이남의 고주(함남 고원) 등지에 축성하여 특히 동해안을 따라 남침하는 여진족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979년(경종 4)에는 청천강 상류의 희천에 청새진을 설치하고, 984년(성종 3)에는 거란의 군사력이 팽창하자 압록강 연안 요지에 축성하여 대비태세를 강화했다. 서북계와 동북계에 축조된 성곽들은 일반적으로 배산임수의 자연지형을 이용했다. 후방의 산자락에 의지하고 전면이나 측면에 하천을 끼고 있는 평산성을 축조함으로써 성곽의 방호력을 높일 수 있었다.
그 후로 불과 10년 만인 993년 요(遼)나라의 침공을 받았다. 요군 사령관은 고려와 화의를 성립시키려는 의도를 노출시켰다.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침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려가 중군사 서희(徐熙)의 외교적 담판으로 오히려‘ 강동 6주’의 영유권을 획득한 반면 거란군은 소득 없이 물러갔다.
1010년 재침한 요군을 맞이해 고려군은 흥화진성(興化鎭城)에서 공성전과 심리전에 말려들지 않고 요군의 특기인 기동력을 무력화시키면서 시간을 끌었다. 공성전이 장기화되자 요군 진영에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이 틈을 타서 고려군이 방위태세를 강화하자 고려측의 화의 요구를 받아들여 또다시 철군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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