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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남6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Ⅳ 조경남 『난중잡록』의 사료적 가치 『난중잡록』 저자 조경남의 11대 맏손자인 조태희(趙台熙)의 간행사에 의하면 인조 때 『선조수정실록』을 간행하면서 『난중잡록』 초본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대부 출신으로 의병장을 지내기도 한 조경남의 『난중잡록』이 수정실록 편찬에 참조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록 수정 작업이 끝난 후에 원본은 1657년(효종8) 본가로 반환되었고, 부본은 정부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이때 정부에 부분으로 남아있던 『난중잡록』이 1909년〜1911년에 고서간행회가 『대동야승』을 간행할 때 제26권부터 34권까지 9책으로 간행하는데 대본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같은 중요성 때문에 『대방기문(帶方記聞)』, 『동국춘추』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 왕조 개국 이래 200년.. 2020. 12. 18.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四)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 의병장은 정유년(1597) 8월에 비로소 자신이 외조모에 의지하여 자랐으므로 어머니로 부르게 된 까닭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남원성 전투를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저자가 남원성에서 멀지 않는 용추동에 외조모를 모시고 피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우회하여 쳐들어온 왜적의 진입경로를 상세히 기술한 것도 전라도 지역의 전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로부터 조경남은 자신의 움직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유년(1597) 10월 23일에는 노략질하는 왜적을 맞아 싸우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조경남의 의병활동이 이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술년(1598) 6월에는 전라 병사 이광악(李光岳)의 휘하에 ‘막사(幕士)’로 종사하게 되었는데.. 2020. 12. 15.
원릉군 원균 장군 묘역을 답사하며 2020년 11월 10일 그동안 미루던 원균 장군 묘역을 답사했다. 용인 이동면 사는 친구의 안내로 평택시 도일동에 위치한 원균 장군의 묘역과 관련 유적들을 답사했다. 원균 장군은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참전하고,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출전했다가 전사하신 무장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인물이다. 그리고 원균 장군의 공과에 대해 많은 편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 많은 무인들이 있었으나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분은 매우 적다. 무인적인 기질로 인해 기록을 남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결과 인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기록을 남기신 충무공 이순신 같은 분들은 이때 남긴 기록으로 인해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왔었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을 남기.. 2020. 12. 13.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一) 왜란이 발발한 임진년(1592) 4월의 후반부 17일간 조경남 『난중잡록』의 기록은 왜군의 침입과 북상, 관군의 어이없는 대응, 곽재우 의병의 봉기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면서 초기 상황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특히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척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을 “척후의 정탐은 병가의 요략(要略)”이라고 지적하며 비판한 것은 조경남 의병장의 병법에 관한 이해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신립이 충주에서 패전한 소식이 들리면서 수라장이 된 도성의 분위기를 기록하고 말미에 “천지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흉악한 왜적에게 마저 부끄러움을 느낀다.”라고 조경남 의병장은 탄식했다. 이 같이 관군의 무력함에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한 부분은 『난중잡록』에 자주 보이는 기록이다. 선조가 4월 말에 도성을 떠.. 2020.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