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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10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10)-되돌아 본 충장공 양헌수 대장의 일생 무인의 문집인 『하거집』의 내용을 통해 느껴지는 저자 양헌수에 대한 인상은 문무겸전한 ‘선비 무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는 조선의 격변기인 19세기를 살았던 전형적인 무인이다. 동시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여 학자적 소양을 풍부하게 갖춘 행정가이기도 했다. 증조부와 조부가 각각 병사와 수사를 역임한 전통을 계승하여 무인의 길로 들어선 후에도 책을 멀리하지 않았고, 다양한 종류의 글을 남겼다. 특히 『하거집』에는 양헌수의 관직생활과 관련된 저술들이 많다. 일반 문인 학자들의 문집과 다른 점이다. 주로 군수․목사(牧使)․병사․어영대장․좌포장․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작성한 글이다. 그래서 행정 문서로서의 성향이 강.. 2020. 4. 10.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9)-무인 양헌수의 독특한 문집 『하거집』 조선시대에 이른바 ‘문집’으로 불리는 개인의 문학 작품집은 문인 학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따라서 무인의 문집은 매우 드물었다. 양헌수는 유학을 전공하다가 무인이 되었지만 항상 책을 가까이했다. 유학자의 습성을 지닌 무인이었기에 군수․목사․병사․어영대장․좌포장․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하거집(荷居集)』을 남길 수 있었다. 여느 무인들과는 달리 양헌수가 남긴 『하거집』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문무겸전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양헌수가 견지했던 선비로서의 학문적 자세에 대해 영선사로 잘 알려진 김윤식은 ‘무인의 수련을 쌓기 위해 아침에 집을 나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길을 걸으며 『대학(大學)』을 암송하고, 날이 저물어 돌아올 때는 『중용(中庸)』을 외우는 ‘공부벌레’였다고 회고했다... 2020. 4. 8.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8)-임오군란도 비켜간 청백리 ‘양대장’ 집 정족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양헌수는 한성부 우윤(정3품)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히려 무거웠다. 서구 열강의 재침이 두려워 관직을 내놓고 낙향하는 관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양헌수는 “우리 집안은 국가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유사시에는 나라에 몸을 바쳐야 하는데 어찌 한 발자국인들 떠날 수 있겠는가.” 라고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 양헌수는 용양위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진무영 중군, 어영청 중군, 금위영 중군,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사옹원제조 등 요직을 거쳤다. 1869년 12월에는 황해도 육군의 최고사령관인 황해병사(종2품)로 부임하여 외직으로 나갔다. 자신의 조부 양완(梁垸)이 경상좌수사를 역임했고, 또 증조부 양세현(梁世絢)이 앞서 황해병사를 역임한 뒤였다. 증조부가.. 2020. 4. 6.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6)-전술의 기본에 충실한 천총 양헌수 양헌수는 선발대 38명을 직접 이끌고 11월 6일 오후 4시경 덕포 나루에 도착했다. 앞서 숨겨 둔 선박을 끌어내 도하 준비를 갖추고, 이날 저녁에 후속 부대가 도착하자 5척으로 도하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이튿날(11.7) 새벽에 중군 이용희로부터 통진부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덕포와 통진부의 중간쯤 되는 곳에 이르자 다시 덕포로 돌아가 계획대로 추진하라는 명령이 다시 전달되었다. 덕포로 돌아온 양헌수는 날이 어두워지자 제1진 170명을 3척에 나누어 도하시켰다. 이때 후방 쪽에서 뱃머리를 돌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양헌수는 짐짓 목청을 높여 ‘소리친 자를 당장 잡아와 목을 쳐라’고 호통을 쳤다. 겁먹은 군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 제1진이 광.. 2020.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