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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32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1)-해외 파병 역사의 이해 우리 역사에서 대외파병은 ‘파병’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범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다른 나라와 연합작전을 염두에 둔 파병이라면 13세기 후반 고려가 원(元)나라 몽골군과 일본 원정에 출병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13세기 이후로 21세기 초반에 접어든 오늘날까지 7백여 년의 파병 역사가 있다. 그러나 시대적 환경과 군사적 상황은 제각기 달랐다. 자위적 수단으로 출병하는 경우는 연합군을 편성하기 보다는 단독으로 작전을 벌였다. 주변 강국의 요청에 따라 무리한 출병을 단행한 경우는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파병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자주권이 크게 제약되어 일방적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례가 많았다. 불가피한 파병은 전장에 출동하는 군사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많은 고통이 뒤따.. 2020. 4. 27.
조선의 천주교 박해와 프랑스함대의 침공 조선에서는 신유사옥과 기해사옥 등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성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양반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조선 지배층의 위기의식도 함께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63년(철종 14) 12월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세도정치의 폐단을 제거하여 국왕의 전제권을 강화시키고, 쇠퇴해가는 유교적 전통 질서를 재건하는데 주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할 방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고종 즉위 이듬해인 1864년 2월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부에서 통상을 요구하는 등 남진 위협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 같은 국가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인 선교사를 이용하는 방안이 제기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 2020. 3. 10.
병인양요 당시 조선 주변의 시대상황(feat. 포함외교) 조선사회는 17세기 초 명나라에서 서양의 과학 문명과 함께 유입되어 ‘서학(西學)’으로 불리던 천주교가 몰락한 양반과 중인층은 물론 상민과 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확산되자 18세기 후반부터는 사상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조선 지배층은 불안했다. 장차 조선 사회의 전통적 신분질서를 붕괴시킬 우려가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결국 1785년(정조 9) 천주교 포교 금지령이 내려졌다. 1800년 정조(正祖)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11세로 즉위한 이듬해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模)와 3백여 명의 신자들이 유배 혹은 처형당하는 신유사옥(辛酉邪獄)이 발생했다. 그리고 1836년(헌종 2) 1월 이후로 비밀리에 입국한 3명의 프랑스인 선교사의 선교활동으로 신자가 급증하자 조야에 강경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2020. 3. 8.
서양의 침략을 막아낸 병인양요의 명장, 양헌수 장군 <병인일기>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서 활약한 명장으로, "서양과 싸워 이긴 유일한 조선인"이라는 타이틀로 유명하다. 양헌수의 『병인일기』는 1866년(고종 3) 음력 9월 3일(양력 10. 11)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 당상관)에 임명되어 6방 중에서 공방(工房)의 업무를 관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양헌수는 양씨 시조의 탄생지인 제주에서 목사(牧使)로 근무하다가 국왕의 부름을 받아 비로소 중앙에 근무하게 된다. 공업(工業) 분야에 관련된 국무를 전문적으로 보좌하는 국왕 비서관에 임명되었다. 이 같은 요직에 근무하게 된 것은 그가 제주목사로 근무할 때 큰 재난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병인일기』의 주요 줄거리를 살펴보면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 2020.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