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무의공 이순신5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6)-전라병영에서 순직한 무의공 이순신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이순신은 포도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서 충청수사를 잠시 맡았다가 1601년 황해병사로 나갔다. 이때 도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은 이순신을 수군에 근무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순신 같이 수전(水戰)에 능한 장수를 육진(陸陣)에 배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그 후 선조는 수원 부사와 경상우병사를 거친 다음에야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 요직을 거치기는 했으나 순탄한 관직생활은 아니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로 임해군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관직을 떠난 적도 있었다. 혐의가 풀리면서 1610년 전라도 육군 최고 사령관인 전라병사로 부임했다. 그 해 9월 ‘장례를 검소하게 할 것이며, 절대로 병영의 군수품을 낭비하지 말라’고 유언한 후 강진의 병.. 2020. 4. 24.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4)-충청수사 이순신과 통제사 이순신 1593년 8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간의 전공을 인정받아 전라․충청․경상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방답첨사 이순신은 한직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결국 해전의 공로가 인정되어 충청수사로 돌아왔다. 1594년 9월 말 제1차 장문포 해전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오른팔이 되어 다시 전장으로 나갔다. 이 무렵 왜군들도 수차례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의 전술을 상당히 간파하고 있었다. 해전 양상도 달라졌다. 왜군은 불리하면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육군과 양면 협공을 하지 않으면 소탕할 수가 없게 되었다. 육지로 도주한 적선 2척을 소각시키는 전과에 만족할 때도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10월 초순에 벌어졌던 영등포 해전․제2차 장문포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유년(1597.. 2020. 4. 20.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3)-통합 함대의 전부장 이순신 왜군은 5월 초순에 수군의 연이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탐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제2차 출전을 서둘렀다.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은 특히 당항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함대 사령관 이순신에게 '산으로 도주한 적이 날이 밝으면 남겨 둔 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할 것이므로 포구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예측대로 6일 새벽에 1백여 명이 승선한 적선이 빠져 나오자 이순신은 근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집중 공격했다. 적장을 포함한 1백여 명을 모조리 수장시켰다. 당시 적선에 실려 있던 주요 문서와 많은 장비들을 노획했다. 통합함대 사령관 이순신은 전투결과보고서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방답첨사 이순신이 전개한 매복전.. 2020. 4. 17.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2)-전라좌수영 함대의 중위장 이순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부산 지역으로 왜군이 쳐들어오자 경상좌수사와 경상우수사가 모두 피신해 버렸다. 무방비나 다름없는 남해안에 왜군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상륙했다.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결행에 들어갔다. 이순신은 5월 5일 거제도 서쪽 미륵도의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元均)의 경상우수영 수군과 합류하기로 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도 참전을 종용했다. 전라좌수영 수군은 주력 전선인 대형 판옥선 24척과 중형 협선(挾船) 15척, 소형 쾌속선인 포작선(鮑作船) 46척으로 함대를 편성했다. 5월 4일 새벽 출전 깃발을 높이 달고 여수항을 떠났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중위장으로서 함대의 주축이 되어 출전했다. 전라좌수영 함대가 당포 앞바다.. 2020. 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