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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4

원릉군 원균 장군 묘역을 답사하며 2020년 11월 10일 그동안 미루던 원균 장군 묘역을 답사했다. 용인 이동면 사는 친구의 안내로 평택시 도일동에 위치한 원균 장군의 묘역과 관련 유적들을 답사했다. 원균 장군은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참전하고,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출전했다가 전사하신 무장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인물이다. 그리고 원균 장군의 공과에 대해 많은 편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 많은 무인들이 있었으나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분은 매우 적다. 무인적인 기질로 인해 기록을 남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결과 인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기록을 남기신 충무공 이순신 같은 분들은 이때 남긴 기록으로 인해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왔었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을 남기.. 2020. 12. 13.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三)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제3권은 계사년 7월부터 5년 6개월의 기록인데, 외형적으로는 분량이 가장 많다. 계사년 후반부는 강화회담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왜군과 명의 지원군 일부가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면서 호남지방으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와 군대에 대한 기록이 크게 증가했다. 명나라 장수 사대수가 남원에 진주하였을 때 저자 조경남 의병장이 그들에게 질문한 부분은 남다른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송대빈의 군사가 기병인 이유는 북방지역의 군사이므로 기병전술을 구사하는 북방민족을 대적하기 위함이며, 낙상지의 군사가 보병인 까닭은 그들이 남방지역 군사이므로 총과 칼을 주 무기로 하는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질문을 통해 파악하게 된 .. 2020. 12. 11.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Ⅲ 오희문 『쇄미록』의 주요 내용 오희문의 일기책 『쇄미록』은 모두 7책으로 구성돼 있다. 제1책은 「임진남행일록」과 「임진일록」, 제2책 「계사일록」, 제3책 「갑오일록」은 각각 1개 책으로 독립돼 있다. 제4책은 「을미일록」·「병신일록」·「정미일록」으로 묶여 있다. 제4책의 「정미일록」은 제5책 전체와 제6책에 「무술일록」과 함께 수록되었다. 나머지 「기해일록」·「경자일록」·「신축일록」은 제7책에 수록했다. 제1책의 「임진남행일록」은 일기가 아니며, 주요 내용이 있을 때만 기록했다. 4월 16일에 전라도 장수에서 왜란이 발발한 소식을 들었다. 또 패전 소식에 안타까워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거나 분석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 특징이다. 역시 제1책에 수록된 「임진일록」의 시작인 1592년 7월부터의 기록은 저자가 몸이 아파 빠트린 것으로 보이.. 2020. 9. 15.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3)-통합 함대의 전부장 이순신 왜군은 5월 초순에 수군의 연이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탐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제2차 출전을 서둘렀다.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은 특히 당항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함대 사령관 이순신에게 '산으로 도주한 적이 날이 밝으면 남겨 둔 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할 것이므로 포구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예측대로 6일 새벽에 1백여 명이 승선한 적선이 빠져 나오자 이순신은 근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집중 공격했다. 적장을 포함한 1백여 명을 모조리 수장시켰다. 당시 적선에 실려 있던 주요 문서와 많은 장비들을 노획했다. 통합함대 사령관 이순신은 전투결과보고서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방답첨사 이순신이 전개한 매복전.. 2020.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