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32 1-2. 우리나라 성곽 축조의 배경 장기적인 항전이나 군대의 주둔이 필요한 주요 거점 지역에는 목책과 토성의 기능을 능가하는 견고한 석성(石城)을 축조한다. 인근의 자연석을 이용한 석성의 경우는 주로 산악 지형에 따라 산성(山城)으로 축조하는 사례가 많으며, 자연석을 가공하여 축조하는 경우는 평지에 축조하는 평지성(平地城)이 많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인력이 많이 투입되고 비교적 장기간이 소요되는 것이 단점이다. 한 국가의 도성이 평지에 축조된 평지성으로서 인공을 가미한 석재로 축조되는 경우가 대표적일 것이다. 한편 전쟁의 양상에 따라 축성의 위치와 규모 등도 다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3세기 중반 이후로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한 산성이 축조되는 경우일 것이다. 침공군의 목적이 영토를 점령하는데 있지 않고, 물질을 약탈하거나 정치·군사적.. 2020. 5. 22. 1-1. 우리나라 성곽 축조의 배경 우리나라에서 성곽이 처음으로 축조하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대체로 이민족과의 충돌이 빈번했던 북쪽 지역에서 먼저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대륙의 동서로 연결되는 만리장성이 특히‘ 천고마비(天高馬肥:북방민족이 살찐 말을 타고 남쪽 농경민족의 수확물을 약탈하는 고통스러운 시기가 됐다는 의미로 사용됨)’의 계절에 북방 유목 기병의 남침 약탈을 막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서 축조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조선의 경우는 기원전 2세기경 한나라의 침공에 대항하면서 이미 장기간 성곽 공방전을 전개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1∼2세기 무렵에는 남쪽 지방에서도 삼국간에 영토 확장 전쟁의 교두보로서 군사요충지에 성곽을 축조하여 공방전을 전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주요 지역을 장기.. 2020. 5. 19.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7)-국군의 베트남 및 PKO 파병 20세기 중반에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출범한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분단됐고, 1950년 북한군의 남침공격을 받았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과 중공군을 물리쳤다. 10여 년 후인 1964년 베트남에서 전쟁이 격화되었다. 같은 분단국인 ‘베트남에서 공산주의를 차단하는 것이 곧 한반도 안보와 직결된다’는 인식이 퍼져있었다.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가 지원군 파병을 요청해왔다. 대한민국은 그 해 9월 1차로 140명 규모의 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했다. 이어 전투 부대를 수차례 파병하게 되었다. 1971년 12월 1단계 철수가 시작된 이래 1973년 파리 휴전협정 체결에 따라 그해 3월 철수를 완료했다. 8년 반 동안 육해공군 연인원 325,500여명이 참전해 5,000여 명 사상.. 2020. 5. 15.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6)-청의 나선 정벌에 조선 조총수 파병 조선은 명과 후금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중립을 유지한 결과 국정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23년에 광해군을 밀어내고 집권한 인조는 달랐다. 그는 친명배금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양국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급기야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군신맹약으로 치욕적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조선은 절치부심하면서 비밀리에 북벌 계획을 세우고 군비를 확충해나갔다. 특히 효종은 심양에서 인질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즉위했기 때문에 복수심이 남달랐다. 조선에서 북벌의지가 고조되던 17세기 후반에 ‘나선(羅禪)’으로 불리는 러시아 세력이 청국의 흑룡강 유역으로 밀려왔다. 러시아는 흑룡강을 ‘아무르강’이라고 불렀다. 러시아 원정대는 1651년(효종 2)에 아무르강 상류지역 서안.. 2020. 5. 12. 이전 1 ··· 3 4 5 6 7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