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쇄미록4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Ⅳ 오희문 『쇄미록』의 사료적 가치 조선 중기 선비 오희문이 쓴 『쇄미록』은 자신과 가족의 피난 사실을 기록한 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적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그 가치를 인정하여 「한국사료총서」 제14집으로 『쇄미록』 상·하 2책을 간행했다. 일기의 중간이나 책의 끝부분에는 그 시기와 관련이 깊은 국왕 및 왕세자의 교서, 의병의 격문과 통문, 명나라 참전 장수들의 패문, 각종 공문서 등이 첨부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사료총서에는 「추록」이라 하여 별도 목차를 부여했다. 저자 오희문의 12대 맏손자 오정근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자택에 보관하고 있던 수필 원본을 대본으로 하여 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그 후로 해주오씨 추탄공파 문중에서는 1990년에 한글로 번역하고 여기에 원문을 첨부하여 .. 2020. 9. 18.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Ⅲ 오희문 『쇄미록』의 주요 내용 오희문의 일기책 『쇄미록』은 모두 7책으로 구성돼 있다. 제1책은 「임진남행일록」과 「임진일록」, 제2책 「계사일록」, 제3책 「갑오일록」은 각각 1개 책으로 독립돼 있다. 제4책은 「을미일록」·「병신일록」·「정미일록」으로 묶여 있다. 제4책의 「정미일록」은 제5책 전체와 제6책에 「무술일록」과 함께 수록되었다. 나머지 「기해일록」·「경자일록」·「신축일록」은 제7책에 수록했다. 제1책의 「임진남행일록」은 일기가 아니며, 주요 내용이 있을 때만 기록했다. 4월 16일에 전라도 장수에서 왜란이 발발한 소식을 들었다. 또 패전 소식에 안타까워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거나 분석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 특징이다. 역시 제1책에 수록된 「임진일록」의 시작인 1592년 7월부터의 기록은 저자가 몸이 아파 빠트린 것으로 보이.. 2020. 9. 15.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Ⅱ 『쇄미록』 저자 오희문의 가계 『쇄미록』을 저술한 오희문 선생은 해주오씨 시조로부터 13세손이며, 석성 현감 오옥정의 손자다. 장성 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오경민의 아들이다. 어머니 고성 남씨와의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39년(중종34) 윤 7월 25일 충북 영동의 황간 외가에서 출생하여 10여 세 때까지 외사촌들과 함께 자랐다. 저자 오희문은 17세 무렵에 연안 이씨와 혼인하여 조선 초기 명신 이석형의 현손인 이정수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아호는 ‘비연’이다. 결혼 후에는 주로 성균관 북쪽에 위치한 처가에서 처남들과 함께 지냈다. 오희문 대에 이르러 친가는 물론 외가와 매가 및 처가 일족들이 서울에 모여 살면서 가계가 더욱 번성해졌다. 처가의 도움을 받아 노비를 거느리며 규모 있는 양반생활을 영위할 수 있.. 2020. 9. 11.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Ⅰ 오희문 『쇄미록』은 어떤 책인가 『쇄미록』은 조선 중기 사대부 출신 선비 오희문 선생의 저작이다. 그의 가족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직접 체험하거나 보고 들은 각종 전시 상황들을 기록한 개인 일기책이다. 서울을 떠나서 남쪽 지방으로 여행하던 도중에 전란을 당했다. 당시 54세 오희문은 전형적인 서울 양반이었다. 75세 어머니를 모시고 4남 3녀와 그에 딸린 직계가족들을 거느리고 서울 중심가에 살았다. 오희문 선생이 남행길에 오른 것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해인 1591년 11월 27일이다. 충청도 황간에 사는 외숙과 전라도 장수, 영암의 친지들 목천과 연기의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지우들을 방문하며, 성주와 장흥 등지에 있는 외거노비들의 신공을 거두기 위한 다목적 여행길이었다. 목천-연기를 거쳐 장수에서 설날을 보내고 1592년 봄부터.. 2020.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