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평안도와 함경도의 주요 거점에 축성하여 요새화했다. 그리고 북방민족의 특기인 기병전술에 대응해 장병전술을 발전시켰다. 전 왕조인 고려 말기부터 서남해안 일대에서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으나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부터 주로 연해 지역에 소규모 읍성을 견고한 석성으로 개축하여 대비했으나, 국가적 관심은 여전히 북쪽에 집중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에서 산성은 청야입보 기능을 최우선으로 하며, 인마의 출입이 불편한 지형과 지세가 가장 중요한 입지 조건이었다. 즉 산림이 울창하고 벼랑과 바위가 많으며, 식수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지형이 최적지였다. 이 같은 지형은 수성군에게 은폐와 엄폐를 제공해 주지만 공성군에게도 유리한 조건이다. 따라서 공성부대는 성곽과 그 바로 밑까지 은밀하게 접근해 공격할 수도 있다.
조선 왕조 최대의 전란인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던 영의정 유성룡은 전쟁이 끝난 후 산성의 이점을 몇 가지 지적했다. 산성은 높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공성군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어서 수성군에 유리한 작전 환경을 제공해 준다. 공성부대가 토산이나 운제를 이용하지 못하여 성 내부의 정황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정보가 제한된다. 공성부대가 산 밑에서부터 산성까지 기동한 후 공성전을 전개하기 때문에 실제 공성전에는 전투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성부대는 준비하고 있다가 적군이 접근하는 곳에 돌멩이만 굴려도 제압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경사가 급하고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축성된 산성은 수성부대에 유리한 점이 더 많기 때문에 단순한 피란용 산성보다는 전수용(戰守用) 산성으로 축조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전수용 산성에는 포루와 곡성을 설치함으로써 방어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 즉 포루를 설치해 적군의 공성용 화약병기에 대응하고, 곡성을 설치해 적군을 쉽게 감제할 수 있으며, 수성군도 화약병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된 것이다.
한편 평지에 축성된 읍성도 거주민의 재산과 생명을 현장에서 보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견고하게 구축되었다. 산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많은 장비와 노력이 투입되는 것에 반해 평지성인 읍성에서는 현장에서 신속하게 대응태세를 갖출 수 있는 장점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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