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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문5

『쇄미록』 저자 오희문의 손자 오달제의 충혼을 모신 현절사 남한산성 벌봉에서 내려가다가 현절사(顯節祠)에 들렸다.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도로 건너서 산길을 100m쯤 가면 나타나는 현절사는 병자호란 이후 청의 심양에 끌려가서 순절한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충혼을 모신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과 부속건물이 몇 채 있는 소박하며 절제된 건축물이다. 삼학사 중에 한 분인 오달제(吳達濟) 선생은 임진왜란의 아픔을 절절히 기록한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 선생의 손자다. 『쇄미록』과 함께 저자인 오희문의 가계에 관해서도 장남 오윤겸과 함께 블로그에 수차례 소개했었다. 장남 오윤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명신으로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청의 칼날 아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순절한 ‘삼학사’의 한 분인 오달제 선생도 이.. 2020. 11. 24.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Ⅳ 오희문 『쇄미록』의 사료적 가치 조선 중기 선비 오희문이 쓴 『쇄미록』은 자신과 가족의 피난 사실을 기록한 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적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그 가치를 인정하여 「한국사료총서」 제14집으로 『쇄미록』 상·하 2책을 간행했다. 일기의 중간이나 책의 끝부분에는 그 시기와 관련이 깊은 국왕 및 왕세자의 교서, 의병의 격문과 통문, 명나라 참전 장수들의 패문, 각종 공문서 등이 첨부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사료총서에는 「추록」이라 하여 별도 목차를 부여했다. 저자 오희문의 12대 맏손자 오정근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자택에 보관하고 있던 수필 원본을 대본으로 하여 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그 후로 해주오씨 추탄공파 문중에서는 1990년에 한글로 번역하고 여기에 원문을 첨부하여 .. 2020. 9. 18.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Ⅲ 오희문 『쇄미록』의 주요 내용 오희문의 일기책 『쇄미록』은 모두 7책으로 구성돼 있다. 제1책은 「임진남행일록」과 「임진일록」, 제2책 「계사일록」, 제3책 「갑오일록」은 각각 1개 책으로 독립돼 있다. 제4책은 「을미일록」·「병신일록」·「정미일록」으로 묶여 있다. 제4책의 「정미일록」은 제5책 전체와 제6책에 「무술일록」과 함께 수록되었다. 나머지 「기해일록」·「경자일록」·「신축일록」은 제7책에 수록했다. 제1책의 「임진남행일록」은 일기가 아니며, 주요 내용이 있을 때만 기록했다. 4월 16일에 전라도 장수에서 왜란이 발발한 소식을 들었다. 또 패전 소식에 안타까워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거나 분석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 특징이다. 역시 제1책에 수록된 「임진일록」의 시작인 1592년 7월부터의 기록은 저자가 몸이 아파 빠트린 것으로 보이.. 2020. 9. 15.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Ⅱ 『쇄미록』 저자 오희문의 가계 『쇄미록』을 저술한 오희문 선생은 해주오씨 시조로부터 13세손이며, 석성 현감 오옥정의 손자다. 장성 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오경민의 아들이다. 어머니 고성 남씨와의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39년(중종34) 윤 7월 25일 충북 영동의 황간 외가에서 출생하여 10여 세 때까지 외사촌들과 함께 자랐다. 저자 오희문은 17세 무렵에 연안 이씨와 혼인하여 조선 초기 명신 이석형의 현손인 이정수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아호는 ‘비연’이다. 결혼 후에는 주로 성균관 북쪽에 위치한 처가에서 처남들과 함께 지냈다. 오희문 대에 이르러 친가는 물론 외가와 매가 및 처가 일족들이 서울에 모여 살면서 가계가 더욱 번성해졌다. 처가의 도움을 받아 노비를 거느리며 규모 있는 양반생활을 영위할 수 있.. 2020.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