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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4.고려의 성곽 축조와 공방전 양상(2)

by 헬나이트 2020.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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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하던 요나라가 12세기 전반 금(金)나라에 멸망했다.  그러나 금의 세력도 13세기에 접어들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틈에 거란 유족(遺族)이 이탈하자 이들을 지원하던 몽골족이 태도를 돌변하여 1219년 강동성에서 거란 유족과 대치했다. 고려군이 몽골군의 지원을 받아 토벌한 후로 고려는 몽골과 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1231년 몽골군이 귀주지역으로 쳐들어오자 고려군이 귀주성에서 수성전으로 발목을 잡았다. 북로군(제4·5·6군)이 귀주성에서 돈좌됨에 따라 몽골군 본대와 남로군도 남침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귀주성 1차 공방전(1231.9)과 2차 공방전 상황(1231.10)

고려군은 앞서 1010년과 1019년 귀주성에서 요군을 맞이하여 수성전의 승리와 기습전의 실패를 체험한 바 있다. 출성공격을 자제하고 수성전에 주력한 결과 9월부터 12월까지 세 차례 수성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몽골군은 화공작전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성전을 전개했다. 앞서 요군이 전개한 공성전의 양상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대륙의 농경민족과 달리 북방민족인 거란족이나 몽골족이 모두 기병의 기동력을 장기로 삼고, 화공을 주요 공성 수단으로 삼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군과의 공방전을 통해 축적한 전투 경험이 몽골군과의 공방전에 전용되었고,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참고문헌:반영환, 『한국의 성곽』,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몽골군 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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