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32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5)-명의 후금 정벌군에 조선군 파병 17세기 전반 건주여진의 누루하치(奴兒哈赤)는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大金:1616)을 세웠다. 조선은 위협을 느꼈다. 그러나 전통적 우방국 명(明)의 관계도 고심거리였다. 후금은 1618년부터 여진족의 ‘칠대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만주지역의 요충인 무순(요녕성 무순시)과 청하(요녕성 청하 만족자치현)를 점령하며 명을 압박했다. 앞서 조선은 16세기가 저물어가던 1592년 임진왜란을 겪었다. 이때 명군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물심양면으로 큰 빚을 졌다. 지원군을 파견해 달라는 명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의 전쟁 후유증은 여전했다. 그런데 또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뛰어 들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국왕 광해군은 제3자로 관망하고 싶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명의 압박과 조정 중신들의 파병.. 2020. 5. 6.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4)-명의 여진족 정벌에 조선군 파병 조선의 교린정책 대상인 여진족은 15세기 후반 무렵 건주(建州)여진․해서(海西)여진․야인(野人)여진으로 구분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 대륙에 걸쳐 수렵․어로 및 농경에 종사하면서 통합과 분열을 반복해왔다. 야인여진은 파저강(일명 동가강)과 두만강 유역의 우랑카이(兀良哈:오랑캐)부족, 함경도 회령 일대의 우도리(오도리)부족, 목단강․수분하 일대의 우디캐 부족으로 크게 나누어져 살고 있었다. 조선과 가장 근접한 지역에서 복종과 배신을 반복하는 이들을 포함한 여진부족 전체를 조선은 ‘야인’으로 불렀다. 그 중에서도 조선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부족은 주로 우도리족과 우디캐족이었다. 이들은 때때로 조선의 대여진 정책에 반발하여 조직적인 침공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이 강온 양면.. 2020. 5. 4.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3)-조선의 대마도 왜구 정벌군 파병 1392년 출범한 조선은 건국 초기에 왜구의 소굴을 소탕할 원정군을 편성했다. 고려말기부터 서남해안에 출몰해 극성을 부리던 왜구는 이미 사회 혼란의 주범이 되고 있었다. 조선 건국자들은 고려 멸망이 왜구의 침공으로 인한 사회 혼란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여진이나 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교린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국시와도 같은 대외 정책이 위협을 받게 되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앞서 13세기 후반 고려군이 원나라의 일본 침공에 파병한 것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원정군을 편성해 1419년 왜구의 소굴 대마도로 쳐들어갔다. 이른바 ‘기해동정’으로 불리는 조선군의 출병은 1419년 5월에 왜선 40여 척이 충청도 해안에 쳐들어와 약탈․방화한 사건이 계기가.. 2020. 5. 1.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2)-원의 일본 침공에 고려군 파병 고려는 30여년 지속된 몽골과의 적대관계를 1259년 청산했다. 군신관계가 수립되자 몽골의 강력한 정치적 간섭이 시작되었다. 몽골은 1271년부터 원(元)으로 국호를 바꾸고 세계 대제국 건설의 야망을 키웠다. 원나라는 평화적 방법으로 일본과 관계 설정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무력적 방법으로 전환하였다. 원정군에 고려군의 파병을 요구해왔다. 고려는 원의 일본 원정 기지로 전락했다. 주권을 제약받고 있던 고려로서는 원정을 준비하고 군대를 파병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원나라 군대의 전쟁 준비도 고려 땅에서 이루어졌다. 전선 수백 척과 각종 장비 및 군량을 고려가 준비했다. 1274년 1차 원정에 전선 900척을 동원하고 고려 군민 15000여 명이 직접 참전했다. 이른바 고려-원 연합군은 몽한군(蒙漢軍:몽골족.. 2020. 4. 29. 이전 1 ··· 4 5 6 7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