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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19세기 조선(7) -‘서학(천주교)’의 확산과 박해 사건 조선에 전파된 천주교는 서양인 선교사의 포교 활동에 의한 일반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은 특징이 있다. 즉 청국에 왕래하던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서 국내에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조선에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전래되자 서구의 새로운 학문 체계라는 점에서 진보적 유학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청국에 들어온 서양의 과학 문명과 함께 ‘서학’으로 불리면서 학문적·사상적 호기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특히 몰락한 양반과 중인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교세가 확산되어 갔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양반 사회가 붕괴하는 사회적 변화에 편승하여 상민과 천민 계층에까지 광범하게 확산됨으로써 대중 종교로서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천주교는 급속도로 그 저변을 확대해 나가면서 차츰 양반관료 중심사회.. 2020. 8. 28.
격동의 19세기 조선(6) - 조대비 수렴청정과 흥선대원군 예우 새 국왕 고종은 1863년 12월 15일 즉위식이 끝나자 즉위년 첫 업무로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이듬해는 고종 재위 원년이 된다. 즉 유년법 원칙에 따라 즉위년과 원년이 구분되기 때문이다(유월법에 따를 경우는 즉위년이 곧 원년이 된다. 주로 왕조가 교체되거나 반정 등으로 새 국왕이 즉위하는 경우에 유월법을 적용한다). 1864년 1월 2일 대왕대비의 지시에 따라 상호군 이경재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대왕대비 조씨의 측근 세력이 새 조정에 배치되는 첫 사례로 보인다. 7일 호조의 보고에 따라 흥선 대원군궁(大院君宮)의 건물을 신축하고 개축하는 등의 공사비로 1만 7,830냥이 확보되어 공사를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2월 8일 이후로는 전라도 김제·만경·전주·익산의 둔전 조세 중에서 종전대.. 2020. 8. 25.
격동의 19세기 조선(5) - 새 국왕 즉위하고, 조대비는 수렴청정 흥선군의 제2자인 이명복이 익성군으로 입궐하여 즉위하는 시기를 언제로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예조에서 담당한다. 예조는 『국조보감』을 상고하여 크게 두 가지 전례를 제시했다. 성종과 철종의 경우는 입궐하던 당일에 즉위하고, 명종과 선조는 선왕의 성복일에 등극했던 사례에 착안했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는 예조의 건의를 묵살하고 성복일에 즉위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했다. 명종과 선조의 전례가 원용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예조는 대왕대비 조씨가 익성군이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부터 국왕을 대신하여 실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수렴동청정절목’을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수렴하는 처소는 편전으로 하며, 국왕은 수렴 바깥의 한복판에 남쪽을 향해 앉고 대왕대비는 수렴 안의 동쪽 가까이에 역시 남쪽을 향해 앉도록 배치했다. 실.. 2020. 8. 21.
격동의 19세기 조선(4) - 몰락한 가난뱅이 왕손이 새 국왕 1863년 12월 철종이 재위 14년 만인 33세에 승하한 후 추대된 새 국왕은 세자나 왕자 중에서 계승한 경우가 아니다. 이 때문에 그들과 차이점이 많았다. 일반 백성이나 다름없이 궁핍한 야인 생활을 하던 몰락한 왕손의 12세 소년이 용상에 앉는다는 사실이 서울 장안은 물론 전국적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큰 사건이다. 특히 도성과 인접한 서울 장안에서 새 국왕이 될 소년이 입궐하는 행차는 근래에 없는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는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도성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일부는 호위 군사들에게 제지를 받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근세조선정감』에 의하면 구경 나온 도성 주민들이 군사들에게 강압적인 제지를 당하자 이를 목격한 소년 국왕 이명복이 원상 정.. 2020. 8.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