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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격동의 19세기 조선(5) - 새 국왕 즉위하고, 조대비는 수렴청정

by 헬나이트 2020.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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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군의 제2자인 이명복이 익성군으로 입궐하여 즉위하는 시기를 언제로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예조에서 담당한다. 예조는 『국조보감』을 상고하여 크게 두 가지 전례를 제시했다. 성종과 철종의 경우는 입궐하던 당일에 즉위하고, 명종과 선조는 선왕의 성복일에 등극했던 사례에 착안했다.

세종~1909년까지 국왕의 모범적 치적 사례를 편년체로 기록한 『국조보감』(국립고궁박물관)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는 예조의 건의를 묵살하고 성복일에 즉위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했다. 명종과 선조의 전례가 원용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예조는 대왕대비 조씨가 익성군이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부터 국왕을 대신하여 실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수렴동청정절목’을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수렴하는 처소는 편전으로 하며, 국왕은 수렴 바깥의 한복판에 남쪽을 향해 앉고 대왕대비는 수렴 안의 동쪽 가까이에 역시 남쪽을 향해 앉도록 배치했다.

 국왕의 공식 업무 공간인 편전, 어좌(용상)를 중심으로 사관과 승정원 관원이 배석하고 주요 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가 열리는 곳 

실제로 정무를 처리할 때는 국왕이 주요 사안을 주사관에게 보고받아서 직접 처리하거나 대왕대비의 의사를 물어서 처리하며, 대신들이 수렴 앞에서 주대한 가운데 대왕대비가 직접 교지를 내릴 수도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1개월 마다 여섯 차례의 접견과 조참, 상참은 전례에 따라 함께 정사를 처리하되, 대정령·대전례, 변방지역의 긴급한 보고가 있을 때는 수시로 청대하거나 회의를 소집할 수 있도록 하는 예외규정도 만들었다.

한편 사안이 중대한 사전·군사·형벌·과시·관직 등에 관한 업무는 모두 국왕이 대왕대비에게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했다. 국왕이 참석하는 경연에도 대왕대비가 수시로 참석하여 수렴 안에서 청강하도록 했다. 경연석상에서 이루어지는 국정 논의에도 간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로써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으로 조선 조정의 실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새 국왕은 인정문에서 즉위한 후 면복을 착용하고 대왕대비 조씨가 있는 편전으로 백관을 인솔하고 나아가 편전 마당에서 절차에 따라 하례를 올리도록 했다. 이때 국왕이 전 위로 올라가고, 대신과 2품 이상이 차례로 따라 올라가서 대왕대비전과 국왕에게 문안을 드린 후 다시 자리로 돌아가며, 대왕대비는 안으로 돌아가고 국왕은 면복을 상복으로 갈아입고 대신들과 함께 복귀하도록 절차를 마련했다.

앞서 효종. 현종,숙종, 영조가 즉위했던 창덕궁 인정문(한국관광공사)

1863년 12월 12일에 거행한 새 임금의 관례도 창덕궁 인정전 옆 중희당에서 대왕대비가 주관했다. 이튿날 13일 익성군은 면복을 입고 대보를 받아 전왕인 철종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국왕과 대왕대비는 희정당에서 수렴동청정 절차도 함께 시행했다. 이로써 대왕대비 조씨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기는 했으나, 한미한 왕족 흥선군이 자신의 아들을 용상에 앉히려는 원대한 계획도 성공하게 된 것이다. 당시 흥선군은 야심 많은 44세 청장년이었다.

창덕궁 희정당(보물 제8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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