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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Ⅲ 오희문 『쇄미록』의 주요 내용 오희문의 일기책 『쇄미록』은 모두 7책으로 구성돼 있다. 제1책은 「임진남행일록」과 「임진일록」, 제2책 「계사일록」, 제3책 「갑오일록」은 각각 1개 책으로 독립돼 있다. 제4책은 「을미일록」·「병신일록」·「정미일록」으로 묶여 있다. 제4책의 「정미일록」은 제5책 전체와 제6책에 「무술일록」과 함께 수록되었다. 나머지 「기해일록」·「경자일록」·「신축일록」은 제7책에 수록했다. 제1책의 「임진남행일록」은 일기가 아니며, 주요 내용이 있을 때만 기록했다. 4월 16일에 전라도 장수에서 왜란이 발발한 소식을 들었다. 또 패전 소식에 안타까워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거나 분석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 특징이다. 역시 제1책에 수록된 「임진일록」의 시작인 1592년 7월부터의 기록은 저자가 몸이 아파 빠트린 것으로 보이.. 2020. 9. 15.
거문도에 찾아온 두 번째 손님, 미국 군함 와추셋호 1854년 제정 러시아 함대가 처음으로 거문도를 다녀갔다. 원활하게 소통도 잘 되었다.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에 오기 20여 일 전에 일본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었다. 페리(M.C.Perry)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들이 함포의 위력으로 개항을 약속 받은 사건이다. 이른바‘포함외교’에 일본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당시야 암담했겠지만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에 개항한 것이 오히려 일본의 행운이 되지 않았나. 조선은 영토욕이 강한 일본에 개항하면서 민족 불행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페리제독이 일본에 사용한 방식 그대로 강화도에 와서 개항을 압박한 것이다. 역시 일본은 남의 것 흉내 내는데 뛰어난 민족임에 틀림이 없다.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은 ‘강화도 조약’이다. 1856년 미국은 일본과 가나가와 조약을 체.. 2020. 9. 13.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Ⅱ 『쇄미록』 저자 오희문의 가계 『쇄미록』을 저술한 오희문 선생은 해주오씨 시조로부터 13세손이며, 석성 현감 오옥정의 손자다. 장성 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오경민의 아들이다. 어머니 고성 남씨와의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39년(중종34) 윤 7월 25일 충북 영동의 황간 외가에서 출생하여 10여 세 때까지 외사촌들과 함께 자랐다. 저자 오희문은 17세 무렵에 연안 이씨와 혼인하여 조선 초기 명신 이석형의 현손인 이정수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아호는 ‘비연’이다. 결혼 후에는 주로 성균관 북쪽에 위치한 처가에서 처남들과 함께 지냈다. 오희문 대에 이르러 친가는 물론 외가와 매가 및 처가 일족들이 서울에 모여 살면서 가계가 더욱 번성해졌다. 처가의 도움을 받아 노비를 거느리며 규모 있는 양반생활을 영위할 수 있.. 2020. 9. 11.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Ⅰ 오희문 『쇄미록』은 어떤 책인가 『쇄미록』은 조선 중기 사대부 출신 선비 오희문 선생의 저작이다. 그의 가족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직접 체험하거나 보고 들은 각종 전시 상황들을 기록한 개인 일기책이다. 서울을 떠나서 남쪽 지방으로 여행하던 도중에 전란을 당했다. 당시 54세 오희문은 전형적인 서울 양반이었다. 75세 어머니를 모시고 4남 3녀와 그에 딸린 직계가족들을 거느리고 서울 중심가에 살았다. 오희문 선생이 남행길에 오른 것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해인 1591년 11월 27일이다. 충청도 황간에 사는 외숙과 전라도 장수, 영암의 친지들 목천과 연기의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지우들을 방문하며, 성주와 장흥 등지에 있는 외거노비들의 신공을 거두기 위한 다목적 여행길이었다. 목천-연기를 거쳐 장수에서 설날을 보내고 1592년 봄부터.. 2020.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