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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49

격동의 19세기 조선(1) - 흥선군, 그는 누구인가? 흥선군(興宣君) 이하응은 자신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조선 26대 국왕으로 만든 인물이다. 그는 24세 때인 헌종 9년(1843) 흥선군이 되었다. 아들이 국왕이 되자 국왕의 생부이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 남연군은 인평대군(인조의 3남)의 6대손인 이병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연군 이구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 영조의 증손자가 되었다. 따라서 흥선군은 영조의 현손(玄孫)이 된다. 남연군 이구는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와 혼인하여 1820년(순조 20) 음력 12월 21일 안국동궁에서 흥선군 이하응을 낳았다. 아들 이하응이 12세 때 민씨와 사별했다. 양아버지인 은신군이 모함을 당해 제주도 귀양지에서 변사한 후로 순조 때는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아들 흥.. 2020. 8. 7.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6)-전라병영에서 순직한 무의공 이순신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이순신은 포도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서 충청수사를 잠시 맡았다가 1601년 황해병사로 나갔다. 이때 도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은 이순신을 수군에 근무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순신 같이 수전(水戰)에 능한 장수를 육진(陸陣)에 배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그 후 선조는 수원 부사와 경상우병사를 거친 다음에야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 요직을 거치기는 했으나 순탄한 관직생활은 아니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로 임해군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관직을 떠난 적도 있었다. 혐의가 풀리면서 1610년 전라도 육군 최고 사령관인 전라병사로 부임했다. 그 해 9월 ‘장례를 검소하게 할 것이며, 절대로 병영의 군수품을 낭비하지 말라’고 유언한 후 강진의 병.. 2020. 4. 24.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5)-경상우수사 이순신과 충무공 이순신 명량해전 이후로 수군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이순신은 경상우수사가 되어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돌아왔다. 1598년 9월 하순부터 장기간 전개된 순천 왜교성(倭橋城) 전투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조·명 연합작전에 참전했다. 이때 경상우수사 이순신의 지위는 통제사 이순신 다음가는 부사령관 격이었다. 왜란 발발 초기부터 의기투합 연전연승한 두 지휘관이 다시 수군을 이끌게 된 것이다. 군사들도 사기가 충천했다. 반면에 왜군은 더욱 위축되어 수륙 양면 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무렵 왜군 진영에는 본국으로 철수하라는 밀명이 하달되었다.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은 명군 도독 진린(陳璘)을 매수하여 퇴로를 확보하려 했다. 통제사 이순신은 진린의 지시를 거부했다. 결국 왜군은 사천 남쪽 창선.. 2020. 4. 22.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4)-충청수사 이순신과 통제사 이순신 1593년 8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간의 전공을 인정받아 전라․충청․경상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방답첨사 이순신은 한직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결국 해전의 공로가 인정되어 충청수사로 돌아왔다. 1594년 9월 말 제1차 장문포 해전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오른팔이 되어 다시 전장으로 나갔다. 이 무렵 왜군들도 수차례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의 전술을 상당히 간파하고 있었다. 해전 양상도 달라졌다. 왜군은 불리하면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육군과 양면 협공을 하지 않으면 소탕할 수가 없게 되었다. 육지로 도주한 적선 2척을 소각시키는 전과에 만족할 때도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10월 초순에 벌어졌던 영등포 해전․제2차 장문포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유년(1597.. 2020.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