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군(興宣君) 이하응은 자신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조선 26대 국왕으로 만든 인물이다. 그는 24세 때인 헌종 9년(1843) 흥선군이 되었다. 아들이 국왕이 되자 국왕의 생부이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 남연군은 인평대군(인조의 3남)의 6대손인 이병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연군 이구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 영조의 증손자가 되었다. 따라서 흥선군은 영조의 현손(玄孫)이 된다.
남연군 이구는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와 혼인하여 1820년(순조 20) 음력 12월 21일 안국동궁에서 흥선군 이하응을 낳았다. 아들 이하응이 12세 때 민씨와 사별했다. 양아버지인 은신군이 모함을 당해 제주도 귀양지에서 변사한 후로 순조 때는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아들 흥선군이 18세 되던 1837년(헌종 3) 남연군은 세상을 떠났다.
흥선군은 명당으로 알려진 충청남도 덕산의 가야산 자락에 남연군의 묘역을 만들었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당이 무슨 큰 보물이라도 매장돼 있는 줄 알고 도굴하다가 실패하고 달아났던 그 사건의 현장이다.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도 왕족으로서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몰락한 양반이나 다름없이 가난에 시달리며 성장했다. 이하응의 청소년기 가정환경은 그의 인격 형성과 사회 적응력을 높이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1846년 헌종이 자신의 아버지 익종(翼宗)의 수릉을 이장할 때 흥선군 이하응을 천장도감의 대전관에 임명했다. 익종은 순조의 세자로 책봉되어 19세부터 부왕의 명령에 따라 대리청정을 시작했으나 용상에 오르지 못한 채 22세로 요절했다. 그 아들 헌종이 즉위한 후 자신의 아버지를 익종으로 추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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