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 이후로 수군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이순신은 경상우수사가 되어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돌아왔다. 1598년 9월 하순부터 장기간 전개된 순천 왜교성(倭橋城) 전투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조·명 연합작전에 참전했다.
이때 경상우수사 이순신의 지위는 통제사 이순신 다음가는 부사령관 격이었다. 왜란 발발 초기부터 의기투합 연전연승한 두 지휘관이 다시 수군을 이끌게 된 것이다. 군사들도 사기가 충천했다. 반면에 왜군은 더욱 위축되어 수륙 양면 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무렵 왜군 진영에는 본국으로 철수하라는 밀명이 하달되었다.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은 명군 도독 진린(陳璘)을 매수하여 퇴로를 확보하려 했다. 통제사 이순신은 진린의 지시를 거부했다. 결국 왜군은 사천 남쪽 창선도에 집결하여 인접 왜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한 통제사 이순신은 11월 19일 새벽 왜군 구원 함대 5백여 척의 진로를 막고 있다가 공격했다. 이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도독 진린의 대장선이 포위되었다가 조선 수군의 도움을 받아 겨우 빠져 나올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이순신이 지휘하는 함대가 적선 10여 척을 불태우자 전황이 반전되었다.
전투가 한창 치열한 가운데 통제사 이순신이 적의 흉탄에 맞았다. 그는 ‘전투가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경상우수사 이순신은 그날 정오가 될 무렵까지 마지막 해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통제사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없이 전장을 정리하여 함대를 재편성했다. 아비규환의 전장을 수습한 후 함대를 지휘하여 통제영으로 돌아왔다. 이 해전을 끝으로 지루한 전쟁도 막을 내렸다.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해전을 경상우수사 이순신이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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