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49 격동의 19세기 조선(8) - 정치적 변화, 짧았던 밀월관계 1849년 헌종을 이어 철종이 즉위한 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크게 완화되었다. 청나라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1857년(철종 8)에는 천주교 신자가 13,000여 명에 이르고, 1860(철종 11) 이후로는 18,000여 명에 달했다. 그리하여 1861년에는 서울과 그 부근 지역에 새로운 교구가 설치되었다. 천주교 서적들이 출판되어 보급이 확대되자 궁녀나 왕실 부녀자들도 신자가 되는 사례가 늘어났다. 1863년(철종 14) 12월 고종이 즉위하고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하는 가운데 국왕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의 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주교계와 우호적 관계가 형성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즉 국내적으로는 새 국왕의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강대국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해.. 2020. 9. 1. 격동의 19세기 조선(7) -‘서학(천주교)’의 확산과 박해 사건 조선에 전파된 천주교는 서양인 선교사의 포교 활동에 의한 일반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은 특징이 있다. 즉 청국에 왕래하던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서 국내에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조선에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전래되자 서구의 새로운 학문 체계라는 점에서 진보적 유학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청국에 들어온 서양의 과학 문명과 함께 ‘서학’으로 불리면서 학문적·사상적 호기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특히 몰락한 양반과 중인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교세가 확산되어 갔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양반 사회가 붕괴하는 사회적 변화에 편승하여 상민과 천민 계층에까지 광범하게 확산됨으로써 대중 종교로서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천주교는 급속도로 그 저변을 확대해 나가면서 차츰 양반관료 중심사회.. 2020. 8. 28. 격동의 19세기 조선(6) - 조대비 수렴청정과 흥선대원군 예우 새 국왕 고종은 1863년 12월 15일 즉위식이 끝나자 즉위년 첫 업무로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이듬해는 고종 재위 원년이 된다. 즉 유년법 원칙에 따라 즉위년과 원년이 구분되기 때문이다(유월법에 따를 경우는 즉위년이 곧 원년이 된다. 주로 왕조가 교체되거나 반정 등으로 새 국왕이 즉위하는 경우에 유월법을 적용한다). 1864년 1월 2일 대왕대비의 지시에 따라 상호군 이경재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대왕대비 조씨의 측근 세력이 새 조정에 배치되는 첫 사례로 보인다. 7일 호조의 보고에 따라 흥선 대원군궁(大院君宮)의 건물을 신축하고 개축하는 등의 공사비로 1만 7,830냥이 확보되어 공사를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2월 8일 이후로는 전라도 김제·만경·전주·익산의 둔전 조세 중에서 종전대.. 2020. 8. 25. 격동의 19세기 조선(5) - 새 국왕 즉위하고, 조대비는 수렴청정 흥선군의 제2자인 이명복이 익성군으로 입궐하여 즉위하는 시기를 언제로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예조에서 담당한다. 예조는 『국조보감』을 상고하여 크게 두 가지 전례를 제시했다. 성종과 철종의 경우는 입궐하던 당일에 즉위하고, 명종과 선조는 선왕의 성복일에 등극했던 사례에 착안했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는 예조의 건의를 묵살하고 성복일에 즉위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했다. 명종과 선조의 전례가 원용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예조는 대왕대비 조씨가 익성군이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부터 국왕을 대신하여 실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수렴동청정절목’을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수렴하는 처소는 편전으로 하며, 국왕은 수렴 바깥의 한복판에 남쪽을 향해 앉고 대왕대비는 수렴 안의 동쪽 가까이에 역시 남쪽을 향해 앉도록 배치했다. 실.. 2020. 8. 21. 이전 1 ··· 4 5 6 7 8 9 10 ··· 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