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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49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9)-무인 양헌수의 독특한 문집 『하거집』 조선시대에 이른바 ‘문집’으로 불리는 개인의 문학 작품집은 문인 학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따라서 무인의 문집은 매우 드물었다. 양헌수는 유학을 전공하다가 무인이 되었지만 항상 책을 가까이했다. 유학자의 습성을 지닌 무인이었기에 군수․목사․병사․어영대장․좌포장․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하거집(荷居集)』을 남길 수 있었다. 여느 무인들과는 달리 양헌수가 남긴 『하거집』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문무겸전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양헌수가 견지했던 선비로서의 학문적 자세에 대해 영선사로 잘 알려진 김윤식은 ‘무인의 수련을 쌓기 위해 아침에 집을 나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길을 걸으며 『대학(大學)』을 암송하고, 날이 저물어 돌아올 때는 『중용(中庸)』을 외우는 ‘공부벌레’였다고 회고했다... 2020. 4. 8.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8)-임오군란도 비켜간 청백리 ‘양대장’ 집 정족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양헌수는 한성부 우윤(정3품)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히려 무거웠다. 서구 열강의 재침이 두려워 관직을 내놓고 낙향하는 관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양헌수는 “우리 집안은 국가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유사시에는 나라에 몸을 바쳐야 하는데 어찌 한 발자국인들 떠날 수 있겠는가.” 라고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 양헌수는 용양위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진무영 중군, 어영청 중군, 금위영 중군,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사옹원제조 등 요직을 거쳤다. 1869년 12월에는 황해도 육군의 최고사령관인 황해병사(종2품)로 부임하여 외직으로 나갔다. 자신의 조부 양완(梁垸)이 경상좌수사를 역임했고, 또 증조부 양세현(梁世絢)이 앞서 황해병사를 역임한 뒤였다. 증조부가.. 2020. 4. 6.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7)-양헌수가 필승하는 ‘지피지기’의 전투 양헌수는 11월 9일 오전 9시경에 이미 척후의 보고를 받고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남문과 동문의 경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정족산 어귀에 유인조를 내보냈다. 조선군의 개인화기 사거리가 짧기 때문에 적을 유효사거리 이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전술이다. 유인조는 프랑스군 정찰대가 접근해 오자, 시선을 끌어 유인했다. 프랑스군 1개조를 정족산성 동문 쪽으로 유인한 후 주력부대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이어 2시경에는 올리비에 대령의 본대가 전방 100 미터 지점에 나타났다. 이때 동문에 배치된 포수 이완보(李完甫)가 프랑스군을 조준사격으로 쓰러뜨렸다. 일제 사격 신호였다. 조선군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과 양헌수의 효과적인 작전지휘로 적을 타격했다. 올리비에 대령은 .. 2020. 4. 3.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6)-전술의 기본에 충실한 천총 양헌수 양헌수는 선발대 38명을 직접 이끌고 11월 6일 오후 4시경 덕포 나루에 도착했다. 앞서 숨겨 둔 선박을 끌어내 도하 준비를 갖추고, 이날 저녁에 후속 부대가 도착하자 5척으로 도하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이튿날(11.7) 새벽에 중군 이용희로부터 통진부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덕포와 통진부의 중간쯤 되는 곳에 이르자 다시 덕포로 돌아가 계획대로 추진하라는 명령이 다시 전달되었다. 덕포로 돌아온 양헌수는 날이 어두워지자 제1진 170명을 3척에 나누어 도하시켰다. 이때 후방 쪽에서 뱃머리를 돌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양헌수는 짐짓 목청을 높여 ‘소리친 자를 당장 잡아와 목을 쳐라’고 호통을 쳤다. 겁먹은 군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 제1진이 광.. 2020.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