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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49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3)-통합 함대의 전부장 이순신 왜군은 5월 초순에 수군의 연이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탐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제2차 출전을 서둘렀다.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은 특히 당항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함대 사령관 이순신에게 '산으로 도주한 적이 날이 밝으면 남겨 둔 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할 것이므로 포구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예측대로 6일 새벽에 1백여 명이 승선한 적선이 빠져 나오자 이순신은 근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집중 공격했다. 적장을 포함한 1백여 명을 모조리 수장시켰다. 당시 적선에 실려 있던 주요 문서와 많은 장비들을 노획했다. 통합함대 사령관 이순신은 전투결과보고서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방답첨사 이순신이 전개한 매복전.. 2020. 4. 17.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2)-전라좌수영 함대의 중위장 이순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부산 지역으로 왜군이 쳐들어오자 경상좌수사와 경상우수사가 모두 피신해 버렸다. 무방비나 다름없는 남해안에 왜군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상륙했다.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결행에 들어갔다. 이순신은 5월 5일 거제도 서쪽 미륵도의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元均)의 경상우수영 수군과 합류하기로 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도 참전을 종용했다. 전라좌수영 수군은 주력 전선인 대형 판옥선 24척과 중형 협선(挾船) 15척, 소형 쾌속선인 포작선(鮑作船) 46척으로 함대를 편성했다. 5월 4일 새벽 출전 깃발을 높이 달고 여수항을 떠났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중위장으로서 함대의 주축이 되어 출전했다. 전라좌수영 함대가 당포 앞바다.. 2020. 4. 15.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1)-또 한 사람의 이순신 조선은 건국된 후로 2백 년 동안 평화롭게 살았다. 1592년 4월 일어난 임진왜란은 전쟁을 잊고 살던 조선에 참혹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조선은 수많은 전쟁 영웅들의 활약으로 멸망의 벼랑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 많은 영웅들 중에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대표적 인물로 손꼽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가 지휘한 여러 해전의 승리가 곧 나라를 구한 결정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 또 다른 이순신이 있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마치 그의 분신처럼 전장을 누비던 무의공(武毅公) 이순신(李純信)이다. 1553년(명종8)에 태어나 40세에 임진왜란을 맞이했다. 1545년(인종1)에 태어나 당시 48세이던 충무공 이순신 보다 여덟 살 연하인 셈이.. 2020. 4. 13.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10)-되돌아 본 충장공 양헌수 대장의 일생 무인의 문집인 『하거집』의 내용을 통해 느껴지는 저자 양헌수에 대한 인상은 문무겸전한 ‘선비 무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는 조선의 격변기인 19세기를 살았던 전형적인 무인이다. 동시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여 학자적 소양을 풍부하게 갖춘 행정가이기도 했다. 증조부와 조부가 각각 병사와 수사를 역임한 전통을 계승하여 무인의 길로 들어선 후에도 책을 멀리하지 않았고, 다양한 종류의 글을 남겼다. 특히 『하거집』에는 양헌수의 관직생활과 관련된 저술들이 많다. 일반 문인 학자들의 문집과 다른 점이다. 주로 군수․목사(牧使)․병사․어영대장․좌포장․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작성한 글이다. 그래서 행정 문서로서의 성향이 강.. 2020.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