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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4)-충청수사 이순신과 통제사 이순신

by 헬나이트 2020.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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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8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간의 전공을 인정받아 전라․충청․경상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방답첨사 이순신은 한직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결국 해전의 공로가 인정되어 충청수사로 돌아왔다. 1594년 9월 말 제1차 장문포 해전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오른팔이 되어 다시 전장으로 나갔다.

이 무렵 왜군들도 수차례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의 전술을 상당히 간파하고 있었다. 해전 양상도 달라졌다. 왜군은 불리하면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육군과 양면 협공을 하지 않으면 소탕할 수가 없게 되었다. 육지로 도주한 적선 2척을 소각시키는 전과에 만족할 때도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10월 초순에 벌어졌던 영등포 해전․제2차 장문포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문포 앞바다(경남 거제시 장목면)

정유년(1597)에 다시 대군을 투입하면서 왜군은 남해안의 제해권 탈환이 승전의 관건이라고 판단했다. 먼저 조선 수군의 지휘체계를 와해시키는 계략을 꾸몄다. 일본 첩자 요시라(要時羅)의 농간으로 통제사 이순신이 1597년 2월 26일 파직되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후임 통제사가 되었다. 7월 초순 왜선 6백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들어왔다. 통제사 원균은 7월 14일에 삼도 수군을 모두 이끌고 부산으로 항진했다. 충청수사로 부임했던 이순신은 이때 한직에 있었기 때문에 참전하지 않았다.

왜군의 수륙 합동 작전에 말려든 조선 수군은 고전 끝에 칠천도로 퇴각했다. 16일 새벽 왜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통제사 원균을 비롯해 최고 지휘관들이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겨우 전함 몇 척을 수습하여 전라도 근해로 퇴각했다.

백의종군하고 있던 전 통제사 이순신은 7월 22일 복직되었다. 그리고 8월 말, 진도 벽파진에 도착하자 전열을 재정비했다. 통제사 이순신이 불과 한 달 반 만에 10여 척 전함으로 적선 3백여 척을 격파한 명량해전에도 이순신은 합류하지 못했다. 당시 그의 관직 이동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자세히 알 수는 없는 아쉬움이 있다.

명량해전 재연 축제(전남 여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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