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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6)-전라병영에서 순직한 무의공 이순신

by 헬나이트 2020.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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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이순신은 포도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서 충청수사를 잠시 맡았다가 1601년 황해병사로 나갔다. 이때 도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은 이순신을 수군에 근무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무의공 이순신을 수군에 근무하도록 건의한 한음 이덕형 초상화(부분)

이순신 같이 수전(水戰)에 능한 장수를 육진(陸陣)에 배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그 후 선조는 수원 부사와 경상우병사를 거친 다음에야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 요직을 거치기는 했으나 순탄한 관직생활은 아니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로 임해군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관직을 떠난 적도 있었다. 혐의가 풀리면서 1610년 전라도 육군 최고 사령관인 전라병사로 부임했다. 그 해 9월 ‘장례를 검소하게 할 것이며, 절대로 병영의 군수품을 낭비하지 말라’고 유언한 후 강진의 병영(兵營)에서 58세로 순직했다.

무의공 이순신의 마지막 근무지 전라병영성(전남 강진군)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출전하여 임진왜란의 크고 작은 해전을 모조리 승리로 이끌었던 이순신. 그는 1604년 선무공신 3등, 정2품 자헌대부 완천군(完川君)의 칭호를 받았다. 동시에 증조부에 이르는 3대의 벼슬도 추증되었다. 그의 공로가 가져다준 가문의 영광이었다.

부인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 둔 아들 형제도 아버지를 따라 참전했었다. 형제는 목숨 받쳐 싸웠으나 아무런 공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아버지 이순신은 ‘아비를 보호하기 위함이지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니 사사로이 전공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두 아들의 공적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둘째 아들 이숙(李琡)은 무과에 급제한 후 완산군(完山君)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왜란 때 아버지 이순신과 의기투합하던 흥양 현감 배흥립(裵興立)의 사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공조참판이 된 배흥립이 그를 사위로 삼은 것이다. 배흥립은 경상우도수군절도사(경상우수사)와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를 역임하며 무의공 이순신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무의공 이순신과 사돈지간이 된 배흥립 장군의 묘소(경북 김천 조마면)

또한 장남 이탁(李𤣯)이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효종 때 진무원종공신이 되고, 아버지 이순신은 완천부원군에 추증되었다. ‘무의(武毅)’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은 숙종 때였다. 당시 우의정을 지낸 대학자 허목은 그의 공적을 찬양하는 글을 후세에 남겼다.

무의공 이순신과 그의 두 아들이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이후로 가문은 더욱 번창하여 조선조 명문 집안이 되었다. 정경부인 윤씨와 함께 모셔진 무의공 묘소는 1987년 경기도 광명시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과 부인 합장 묘소(향토문화유산 제4호, 경기 광명시 일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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