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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49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四)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 의병장은 정유년(1597) 8월에 비로소 자신이 외조모에 의지하여 자랐으므로 어머니로 부르게 된 까닭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남원성 전투를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저자가 남원성에서 멀지 않는 용추동에 외조모를 모시고 피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우회하여 쳐들어온 왜적의 진입경로를 상세히 기술한 것도 전라도 지역의 전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로부터 조경남은 자신의 움직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유년(1597) 10월 23일에는 노략질하는 왜적을 맞아 싸우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조경남의 의병활동이 이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술년(1598) 6월에는 전라 병사 이광악(李光岳)의 휘하에 ‘막사(幕士)’로 종사하게 되었는데.. 2020. 12. 15.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三)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제3권은 계사년 7월부터 5년 6개월의 기록인데, 외형적으로는 분량이 가장 많다. 계사년 후반부는 강화회담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왜군과 명의 지원군 일부가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면서 호남지방으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와 군대에 대한 기록이 크게 증가했다. 명나라 장수 사대수가 남원에 진주하였을 때 저자 조경남 의병장이 그들에게 질문한 부분은 남다른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송대빈의 군사가 기병인 이유는 북방지역의 군사이므로 기병전술을 구사하는 북방민족을 대적하기 위함이며, 낙상지의 군사가 보병인 까닭은 그들이 남방지역 군사이므로 총과 칼을 주 무기로 하는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질문을 통해 파악하게 된 .. 2020. 12. 11.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二) 1595년 이후 언젠가 『난중잡록』을 보완할 때, 웅치전투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이 글을 삽입함으로써 내용을 한층 풍부하게 한 사례다. 저자 조경남 의병장의 이 같은 편집 방법에 의하면 『난중잡록』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수정·보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전주의 경기전에 모시고 있던 어영(御影)을 옥구에서 뱃길로 피난시켰다가 1614년 9월 18일에 다시 전주로 옮겨왔다는 기록은 이때까지도 『난중잡록』을 수정·보완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단서다. 『난중잡록』 제2권은 임진년 8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불과 11개월 기록인데, 4권 중에서 가장 적은 분량이다. 그러나 11개월 기간으로 제3권의 5년 6개월 기록 분량과 비교하면 4배며, 제4권에 비하면 무려 9배 많다. 이는 .. 2020. 12. 8.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一) 왜란이 발발한 임진년(1592) 4월의 후반부 17일간 조경남 『난중잡록』의 기록은 왜군의 침입과 북상, 관군의 어이없는 대응, 곽재우 의병의 봉기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면서 초기 상황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특히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척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을 “척후의 정탐은 병가의 요략(要略)”이라고 지적하며 비판한 것은 조경남 의병장의 병법에 관한 이해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신립이 충주에서 패전한 소식이 들리면서 수라장이 된 도성의 분위기를 기록하고 말미에 “천지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흉악한 왜적에게 마저 부끄러움을 느낀다.”라고 조경남 의병장은 탄식했다. 이 같이 관군의 무력함에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한 부분은 『난중잡록』에 자주 보이는 기록이다. 선조가 4월 말에 도성을 떠.. 2020.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