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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격동의 19세기 조선(8) - 정치적 변화, 짧았던 밀월관계

by 헬나이트 2020.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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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헌종을 이어 철종이 즉위한 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크게 완화되었다. 청나라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1857년(철종 8)에는 천주교 신자가 13,000여 명에 이르고, 1860(철종 11) 이후로는 18,000여 명에 달했다. 그리하여 1861년에는 서울과 그 부근 지역에 새로운 교구가 설치되었다. 천주교 서적들이 출판되어 보급이 확대되자 궁녀나 왕실 부녀자들도 신자가 되는 사례가 늘어났다.

최초 신도회장 정약종이 쓴 최초의 대중 교리서 『주교요지』(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1863년(철종 14) 12월 고종이 즉위하고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하는 가운데 국왕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의 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주교계와 우호적 관계가 형성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즉 국내적으로는 새 국왕의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강대국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COREE를 노리는 중국.일본.러시아 삼국 (TOBAE, 1887.02.15)

이 무렵인 1864년 벽두부터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경흥부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는 등 러시아 세력의 남진정책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영국·프랑스 세력을 이용함으로써 러시아 남진을 막는 ‘이이제이’책을 구체화하기에 이르렀다. 즉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Berneux) 주교에게 러시아 남진 세력을 저지하는 데 협력해 주면 선교활동을 보장해 주겠다는 제의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협상 과정은 베르뇌 주교가 1864년 8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 자세히 남아있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1814~1866, 용산 이촌동 새남터 순교)

그런데 흥선대원군과 베르뇌 주교간에 교섭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이로 인해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머지않아 금압령이 해제될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이 참에 김면호·홍봉주·이유일 등은 영국 및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여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들 국가와 군사동맹을 체결하는 데는 프랑스 신부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 같다.

천주교 신자 홍봉주 등이 1866년 1월 국왕 비서실 승정원의 승지 남종삼에게 새로운 건의서를 작성해 줄 것을 의뢰했다. 자신들이 내놓은 의견이 흥선대원군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판단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남종삼은 새 건의서를 흥선대원군에게 보고했다. 이때 비로소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 낸 것 같다. 흥선대원군은 남종삼을 불러 보고서 내용을 재확인하였고, 프랑스 신부들과 면담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남종상 흉상(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순교성지,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출생)

흥선대원군의 파격적인 결정에 대해 천주교계는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조야 인사들의 비난 여론은 한층 격렬해졌다. 당시 왕실의 큰 어른인 조대비(익종 비)를 비롯해 조정 중신들이 일제히 대원군을 비난하면서 천주교 탄압과 쇄국양이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조정의 원로 대신과 영의정 조두순, 좌의정 김병학 등도 천주교계의 대표격인 남종삼을 ‘사학 죄인’으로 처형할 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쇄국정책의 상징, 척화비

이와 같이 조선 조정의 여론이 악화되자 흥선대원군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천주교를 전통 질서에 반항하는 사교로 간주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러시아인들의 통상 요구도 잠잠해졌다. 때마침 청국에서 서양 열강 세력과 천주교를 배척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양이·척사 의식이 한층 고조되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유화적 태도를 바꾸어 탄압하기 시작했다.

잠두봉에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뀐 언덕에 세워진 천주교 순교기념관(서울 마포구 합정동) 

조선 조정은 1866년(고종 3) 2월 천주교 금압령을 반포한 후 프랑스 신부 9명을 처형하고, 이들을 흥선대원군에게 소개한 홍봉주·남종삼 등을 비롯한 신도 8,000여 명도 처형했다. 당시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프랑스 신부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당하고 페롱(Feron)과 리델(Ridel)·칼레(Calais) 신부는 충청도로 피신했다.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중지하고 권좌에서 물러난 것도 이 무렵이다.

          페롱 신부(1827~1903)                 리델 신부(1830~1884, 제6대 조선교구장)            칼레 신부(1833~1884)                                                                                                                              

리델 신부와 신도 10여 명은 6월 29일 충청도 신창현 용당리 포구를 떠나 7월 7일 산둥반도의 즈푸항에 도착했다. 이들에 의해 병인사옥의 전말이 프랑스 외방 전교회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용당리 포구(현 아산시 선장면 가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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