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一)

by 헬나이트 2020. 12. 4.
728x90
반응형

 

왜란이 발발한 임진년(1592) 4월의 후반부 17일간 조경남 『난중잡록』의 기록은 왜군의 침입과 북상, 관군의 어이없는 대응, 곽재우 의병의 봉기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면서 초기 상황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특히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척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을 “척후의 정탐은 병가의 요략(要略)”이라고 지적하며 비판한 것은 조경남 의병장의 병법에 관한 이해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신립이 충주에서 패전한 소식이 들리면서 수라장이 된 도성의 분위기를 기록하고 말미에 “천지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흉악한 왜적에게 마저 부끄러움을 느낀다.”라고 조경남 의병장은 탄식했다. 이 같이 관군의 무력함에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한 부분은 『난중잡록』에 자주 보이는 기록이다.

충주 탄금대 전투 전적비(충북 충주시)

선조가 4월 말에 도성을 떠나고 5월 초에 도성이 왜적에게 함락되면서 조경남 『난중잡록』의 기록은 양적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전 부사 고경명과 주고받은 편지, 격문, 모병 및 군량수송 등이 상세히 기록되고,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군을 중심으로 하는 해전의 초기 상황과 영·호남 지역 초기 의병 봉기 내용이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전라좌수영의 진남관(국보 제304호)과 수군의 해상전투 훈련장

6월의 『난중잡록』 기사도 8일간의 일기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이다. 전라 감사 이광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는 과정과 고경명·김천일·정인홍을 비롯한 전라도와 경상우도 의병장들의 활동 상황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조경남 의병장이 많은 지면을 할애한 곽재우의 경우는 『경상순영록』을 인용하면서도 그의 활약상과 관군과의 갈등 내용을 자세히 소개했다. 따라서 전후시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체계적 기록이라 주목된다.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 기마동상(경남 의령군)

그리고 왜적이 경상도를 유린하고 호남지방을 넘보게 되면서 관련 기사가 『난중잡록』에 자주 보인다. 6월 중순에 안국사혜경의 군대가 부항령을 넘어 무주로 진입하고 소조천융경의 부대가 금산을 점령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왜군의 침공상황과 이에 대항하는 호남 의병들의 활약상을 빈번히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경상순영록』 보다는 『정기록(正氣錄)』을 인용한 기록이 눈에 띈다.

김천 부항면과 무주 무풍면을 연결하던 부항령의 지하를 통과하는 삼도봉 터널

임진년 7월까지의 『난중잡록』 제1권 기사 중에서 6월 기사가 다른 달에 비해 월등히 많다. 7월의 기사도 6월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분량이다. 7월 초에 왜군이 용담에서 장수를 지향하게 되자 지휘관을 잃은 도망병들의 노략질, 이들을 처벌한 남원부사 윤안성과 저자 조경남과의 관계도 재미있는 기사다. 난리를 피해서 용추동에 들어와 있다가 선친과 고향 친구인 윤안성을 만났다고 한 기록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기도 하였다.

정방형의 평지성으로 잘 정비된 남원읍성과 해자(사적 제298호)

웅현(웅치)전투나 이현(이치)전투와 같은 호남 접경지역에서의 전투 기록은 조경남 『난중잡록』의 특징적인 내용 중에 하나다. 고경명 의병의 금산전투 경우도 저자가 있던 용추동과의 지리적 관계로 인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전투다. 김제 유생 조성립 등이 1595년(선조28)에 앞서 전사한 정담(鄭湛)을 신원하는 글을 올리자 그 전문을 일기에 수록한 것도 조경남 『난중잡록』의 특징적인 기술 방법 중에 하나일 것이다.

제봉 고경명 의병장 기마동상(광주광역시 서구)
정담 정려비각(경북 문화재 자료, 영덕군 창수면)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