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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49

제주도 겨울 여행-추사 김정희 선생 유배지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완당'이라는 아호도 흔히 사용한다. '추사체'라는 독보적 글씨체로 우리에게 친근한 분이다. 충청도 예산 신암 용궁리에서 1786년(정조 10) 태어나 1856년(철종 7) 향연 70세를 일기로 경기도 과천에서 별세했다. 추사 선생은 순조 임금 때 5조 판서를 두루 역임한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노경은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명필의 재능이 아들 김정희에게 대물림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희의 증조할머니는 영조의 따님인 화순옹주였다. 그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여 백부인 김노영의 양자가 되었다. 그런데 생부가 고금도에 유배되었던 그 사건에 김정희도 연루되자 1840년(헌종 6)부터 1848년(헌종 14)까지 9년여 동안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석방 후 .. 2021. 2. 9.
제주도 겨울 여행-충장공 양헌수 대장 유적 충장공 양헌수 장군이 병인양요(1866) 직전에 근무했던 제주목사겸방어사 관련 유적이다. 그가 출생한 고향은 경기도 양평군 광탄이다. 그러나 양씨 시조의 탄생지가 제주도인만큼 제주 근무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주도 양씨는 다른 두 성씨인 제주 고씨, 제주 부씨와 함께 '삼성혈'을 시조 탄생 설화의 성지로 공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제주 도민 대부분이 양헌수 목사겸방어사의 윗대 선조와 무관하지 않은 지연적 혈연적 관계로 얽혀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양헌수 자신의 증조부 양세현이 이미 목사겸방어사로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증조부에 이어서 신임 목사겸방어사로 부임한 양헌수가 제주 도민에 대해 느끼는 정감은 분명 남달랐을 것이다. (양헌수 제주 목사겸방어사는 이후로 승승장구하여 병마절도사, 어.. 2021. 2. 5.
‘해주석씨’와 항일 의병장 석상룡(石祥龍)을 아시나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포상정보’에는 석상룡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7년 함양 일대에서 5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주변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梁漢奎)·고제량(高濟亮)·문태수(文泰洙, 泰瑞) 의병장 등과 제휴하여 함양·산청·남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지리산을 본거지로 삼아 왜적 다수를 살상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11년 체포되었다. 5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16년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을 모아 일제에 항거했던 의병장 석상룡은 황해도 해주를 본관으로 하는 해주 석씨다. 그의 선대도 3백 여 년 전 임진년(15.. 2021. 1. 12.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Ⅳ 조경남 『난중잡록』의 사료적 가치 『난중잡록』 저자 조경남의 11대 맏손자인 조태희(趙台熙)의 간행사에 의하면 인조 때 『선조수정실록』을 간행하면서 『난중잡록』 초본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대부 출신으로 의병장을 지내기도 한 조경남의 『난중잡록』이 수정실록 편찬에 참조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록 수정 작업이 끝난 후에 원본은 1657년(효종8) 본가로 반환되었고, 부본은 정부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이때 정부에 부분으로 남아있던 『난중잡록』이 1909년〜1911년에 고서간행회가 『대동야승』을 간행할 때 제26권부터 34권까지 9책으로 간행하는데 대본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같은 중요성 때문에 『대방기문(帶方記聞)』, 『동국춘추』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 왕조 개국 이래 200년.. 2020.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