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 의병장은 정유년(1597) 8월에 비로소 자신이 외조모에 의지하여 자랐으므로 어머니로 부르게 된 까닭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남원성 전투를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저자가 남원성에서 멀지 않는 용추동에 외조모를 모시고 피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우회하여 쳐들어온 왜적의 진입경로를 상세히 기술한 것도 전라도 지역의 전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로부터 조경남은 자신의 움직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유년(1597) 10월 23일에는 노략질하는 왜적을 맞아 싸우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조경남의 의병활동이 이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술년(1598) 6월에는 전라 병사 이광악(李光岳)의 휘하에 ‘막사(幕士)’로 종사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활약상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9월부터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동로·중로·서로·수로(水路)의 4로 병진작전의 내용을 중심적으로 기록하였다. 그 중에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로와 수로의 작전 내용을 기술하고, 특히 통제사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원균 통제사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견해를 주기로 달아 애절하게 표현하였다.
기해년(1599)부터 11년 2개월의 기사를 수록한 제4권의 내용은 선조 대에 이어 광해군 2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전후 명군의 철군과정과 군사력 강화책, 일본의 수교요청, 강항(姜沆)의 귀국과 그가 올린 보고서 내용 등이 주로 기술되고,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역사와 기타 관련 사실을 폭넓게 기술하였다. 전후에 일본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그에 따라 정보량이 많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경자년(1600) 8월에는 조경남 자신이 호랑이를 잡는 과정을 기술한 것도 흥미롭다.
신축년(1601)부터는 조선인 포로의 송환과 관련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와 함께 계묘년(1603)부터는 여진족과 관련된 내용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왜란 이후로 명이 쇠퇴기에 접어들자 그 틈을 타서 발흥하는 여진족에게로 저자 조경남 의병장의 관심이 옮겨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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