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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1)-또 한 사람의 이순신

by 헬나이트 2020.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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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건국된 후로 2백 년 동안 평화롭게 살았다. 1592년 4월 일어난 임진왜란은 전쟁을 잊고 살던 조선에 참혹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조선은 수많은 전쟁 영웅들의 활약으로 멸망의 벼랑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 많은 영웅들 중에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대표적 인물로 손꼽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가 지휘한 여러 해전의 승리가 곧 나라를 구한 결정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 또 다른 이순신이 있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마치 그의 분신처럼 전장을 누비던 무의공(武毅公) 이순신(李純信)이다. 1553년(명종8)에 태어나 40세에 임진왜란을 맞이했다. 1545년(인종1)에 태어나 당시 48세이던 충무공 이순신 보다 여덟 살 연하인 셈이다.

무의공 이순신 잠수함(SS-068)

무의공 이순신은 세종의 큰 형님인 양령대군 6세손이다. 그의 어머니는 안동 김씨다. 아들을 낳을 때마다 돌림자 순(純)에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차례로 붙였다. 다섯째 아들이 ‘순신(純信)’이다. 어려서는 그도 왕가의 여느 자제들처럼 성리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청년 순신은 자신의 특기가 무예에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열심히 익혔다. 25세 때 알성시 을과에 급제한 후로 선전관을 거처 강진 현감, 온성 판관, 의주 판관 등을 역임했다.

의주의 상징인 통군정, 압록강 하구 국경군사도시 의주읍성의 북쪽 장대 

그러나 한 때는 모함을 받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난 적도 있었다. 여진족의 약탈 행위가 자주 일어나자 특명을 받고 혜산진 첨절제사로 나갔다. 그 후 남쪽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해지자 방답진(防踏鎭) 첨절제사로 자리를 옮겼다.

방답진은 남해안 최남단 돌산도에 설치된 전라좌수영 소속 진영이었다. 첨절제사가 지휘하는 수군 군영으로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함대의 전위 부대였다. 이때부터 두 이순신은 상관과 부하로 인연을 맺고 수많은 해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게 된다.

방답진 전선을 건조 및 수리하던 선소 유적(여수시 돌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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