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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3)-통합 함대의 전부장 이순신

by 헬나이트 2020.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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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은 5월 초순에 수군의 연이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탐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제2차 출전을 서둘렀다.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은 특히 당항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함대 사령관 이순신에게 '산으로 도주한 적이 날이 밝으면 남겨 둔 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할 것이므로 포구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예측대로 6일 새벽에 1백여 명이 승선한 적선이 빠져 나오자 이순신은 근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집중 공격했다. 적장을 포함한 1백여 명을 모조리 수장시켰다.

당시 적선에 실려 있던 주요 문서와 많은 장비들을 노획했다. 통합함대 사령관 이순신은 전투결과보고서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방답첨사 이순신이 전개한 매복전을 자세히 기술했다. 특히 왜장의 수급에는 방답첨사 이순신이 별도 표시를 해두었다고 하여, 그의 공로가 돋보이게 배려했다.

10여일 작전에서 적선 70여척을 불사르고 왜군 90여명의 수급과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 대승을 거두었다. 아군은 전사 14명 부상 36명 이었다. 7일에도 거제도 율천리 해안에서 적선 7척을 격파한 후 각각 본영으로 귀환했다.

당포성지와 당포 앞바다(경남 통영시)

왜군들은 6월 하순부터 다시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으로 몰려들었다. 한편 웅천과 부산포에 머물고 있던 함대는 그 간의 패전을 일거에 설욕하려는 듯 전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이러한 왜군을 선제 타격하기 위해 제3차 출전을 단행했다.

전라좌수영 전함 40척에 전라우수영 및 경상우수영 전함이 합류하자 70여척 통합함대가 편성되었다. 7월의 3차 출전에도 방답첨사 이순신은 2차 출전 때와 마찬가지로 전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학익진으로 적선 56척을 쳐부수고 왜군 1백여 명 수급을 노획한 한산도 해전에서는 화살이 바닥나는 격전을 벌였다. 전부장 이순신은 칼을 빼어들고 적선에 뛰어올라 왜군 4명을 목 베는 용맹을 과시했다. 그리고 도주하는 적선 2척에 총통을 발사하여 격침시키는 공을 세웠다.

한산도 대첩 기록화

전부장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에 대해 사령관인 이순신은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에서 “방답첨사 이순신은 다만 적을 쏘아 죽이는데 주력하고 수급을 건지는데 힘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또다시 적선 2척을 추격하여 한꺼번에 불태웠다.” 라고 보고했다. 전라좌수영 함대가 주축이 된 통합함대가 3차례 출전하여 남해안 왜선을 모조리 수장시켰다.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다.

8월 중순이 되자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은 대부분 경상도 지방으로 남하했다. 대부대가 김해성(金海城)에 집결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함대는 해상통로를 봉쇄하기 위해 8월 24일 오후에 모항인 여수항을 떠났다.

25일 사량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여 통합함대 166척으로 8월 하순 낙동강 하구를 봉쇄했다. 그러나 하구로 나오던 적선 6척을 격침시킨 전과가 전부였다. 이에 조선 수군 수뇌부는 부산포 일대에 주둔한 왜수군 8천여 명과 왜선 430여 척을 공격하기로 작전계획을 변경했다.

9월 1일 새벽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다대포와 서평포, 절영도 부근 해역에서 적선 24척을 격침시켰다. 부산포에서는 거북선을 선두에 세우고 화공 작전으로 1백여 척을 불태웠다. 날이 저물자 비로소 가덕도로 물러났다가 이튿날인 9월 2일 각기 본거지로 귀환했다.

제4차 출전에도 전부장으로 참전한 방답첨사 이순신은 초량 방면에서 진로를 차단하는 적선 4척을 격침시켜 기선을 제압하는 공을 세웠다. 부산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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