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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Ⅲ 오희문 『쇄미록』의 주요 내용

by 헬나이트 2020.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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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문의 일기책 『쇄미록』은 모두 7책으로 구성돼 있다. 제1책은 「임진남행일록」과 「임진일록」, 제2책 「계사일록」, 제3책 「갑오일록」은 각각 1개 책으로 독립돼 있다. 제4책은 「을미일록」·「병신일록」·「정미일록」으로 묶여 있다. 제4책의 「정미일록」은 제5책 전체와 제6책에 「무술일록」과 함께 수록되었다. 나머지 「기해일록」·「경자일록」·「신축일록」은 제7책에 수록했다.

제1책의 「임진남행일록」은 일기가 아니며, 주요 내용이 있을 때만 기록했다. 4월 16일에 전라도 장수에서 왜란이 발발한 소식을 들었다. 또 패전 소식에 안타까워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거나 분석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 특징이다.

오희문의 친필 원본 '임진남행일록'

역시 제1책에 수록된 「임진일록」의 시작인 1592년 7월부터의 기록은 저자가 몸이 아파 빠트린 것으로 보이는 1593년 1월 14일부터 3월 말까지 2개월 반을 제외하고는 매일 작성되었다. 임진년 7월 21일에는 「웅치전투」, 8월 22일에는 「이치전투」, 29일에는 「금산전투」를 자세 기록하고, 그밖에 의병 및 승병들의 활동과 전라도 진입을 노리는 왜군의 동향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하였다. 당시 오희문은 자신의 처남인 장수 현감 이윤을 통해 전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오희문이 언급한 의승병 참전기록화(왼쪽이 사명대사)

중대사의 불상이 깨지고 그 속에 있던 ‘복장유물’이 왜적에게 약탈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자기 뱃속에 든 유물도 지키지 못하는 부처이니 영험이 없다”고 한 8월 6일자 일기 내용은 저자 오희문의 불교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9월 1일은 최경회를 비롯한 의병 진영의 소극적인 활동을 비난하면서 김면과 곽재우 의병에 대해서 ‘의병이라는 이름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칭찬한 것은 매우 대조적이다. 9월 6일과 8일의 일기도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0월 1일에 의병다운 의병은 곽재우·김면·홍계남·조헌·김천일·고경명 의병뿐이며, 나머지는 아직 공적을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오희문이 진정한 '의병'이라고 칭찬한 홍의장군 곽재우 기마 동상(경남 의령군)

제2책의 「계사일록」과 제3책의 「갑오일록」은 각각 1년에 1책씩 편집한 것이 다른 책과의 차이점이다. 계사년(1593)의 흥미로운 기사는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이 평양에 이르러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와 대면하는 장면을 마치 현장을 목격한 듯이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오희문이 생생하게 기록한 고니시(왼쪽)와 심유경 회담 장면(KBS드라마 '징비록')

4월 8일에는 명의 수군이 대마도를 공격했으면 퇴로를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조선의 장수들이 명군만 믿고 시일만 보낸다고 한탄했다. 농사철을 앞두고 걱정하면서 걸식하는 사람들이 호남·호서로 몰려들고 있다고 한 것은 강화교섭이 진행되던 당시 상황을 포괄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동시에 명군의 횡포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글을 자주 쓰고 있다.

특히 6월 29일에는 진주성의 아군 상황, 7월 3일과 10일에는 전투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장차 호남지역이 위태롭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조선인들이 왜적의 복장을 하고 노략질하는 ‘가왜(가짜 왜적)’의 횡포와 조선 장수들의 무능과 허위보고, 농경지의 황폐, 가장에게 버림받은 어미와 아이의 비극 등 당시 사회상을 생생하게 기술한 것은 『쇄미록』만의 주요 특징이다. 8월 29일 조보를 읽고 진주성 전투를 다시 거론하기도 했다.

오희문이 자주 언급한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상황 기록화

11월 16일에 명나라 장수 유정의 경주 전투를 끝으로 전투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1594년의 제3책 「갑신일록」은 의병장 김덕령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하여 2월 2일과 11일에도 그의 인물됨과 활동을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전후의 과도한 요역과 굶주린 백성의 고충, 왜군의 5개 요구사항, 왜군 내부의 암투(5월), 명군의 약탈 횡포, 고아의 실상, 호남 토적의 횡포(6월), 항왜(투항한 왜구)들의 횡포(7월)와 같은 비전투 상황들이 갑오년의 주요 내용이다.

오희문이 자랑스러운 의병으로 기술한 충장공 김덕령 사당(광주광역시 북구)

제4책은 1595년 「을미일록」과 이듬해 「병신일록」이 기록의 중심이다. 「을미일록」은 명에서 파견한 왜왕 책봉사의 소식과 이들이 남행하는 고을마다 농사철에 많은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우려한 내용(4월, 5월)을 시작으로, 책봉사가 한양에 머물고 있는 까닭을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본국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확실한 의사를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기록하였다.

현재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하나인 풍신수길 초상

충청 병사로 부임한 원균에 관한 6월 20일 기록은 이순신과의 관계에서 특히 비교될 만하다. 이후의 기록은 국내 잔류 왜군의 축성 및 전선 건조 등의 정황, 명나라 사신의 전란 종결을 위한 활동(6월·7월·9월·12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병신일록」은 명나라 심유경을 비롯한 사신들의 활동에 관한 의문점과 그로 인한 민심의 동요(2월·4월·7월), 왜군의 철수(5월·6월), 이몽학 반란의 시말과 김덕령 관련 소문(7월·8월)에 관한 내용이 중심이다. 특히 김덕령의 연루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4책의 끝 부분인 1월의 기록은 정유재란, 원균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이유, 명나라 사신 왕래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몽학 반란을 다룬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몽학역의 차승원) 장면

정유년 1월의 일기만 제4책에 편집한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1597년의 「정유일록」은 저자의 장남인 오윤겸이 3월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7월부터는 재투입되는 명군의 군세와 이로 인해 조선 백성들이 부담할 군량에 대한 고통, 원균의 전사, 남원 전투(8월)와 재란으로 인한 각처의 혼란상, 명군에 대한 기대(9월) 등이 전투와 관련된 주요 내용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전사한 원균 장군 묘(경기 평택시 도일동 )

그러나 분량은 간단한 편이다. 1598년의 「무술일록」도 마귀·양호 등 명군의 이동 및 전개상황, 울산 전투(1월), 경상도 지역 명군의 상황(2월·4월·5월), 명군의 만행과 조선의 피해(7월·8월), 유정의 순천 전투(10월)를 간략히 기술하고 12월에는 왜군의 퇴각 상황과 이순신의 전사에 관한 기록으로 끝을 맺었다.

전투 중에 적탄에 맞은 통제사 이순신, 노량해전 기록화(경남 통영시 제승당)

마지막 제7책에는 기해(1599), 경자(1600) 2년의 일록과 신축년(1601) 2월까지 총 2년 2개월의 일기를 담고 있다. 기해년은 철군하는 명군과 그들의 만행, 명군과 관왕묘(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사망과 재침 소문(7월) 등이 전란과 직접 관련 있는 주요 내용이다. 「경자일록」은 왜군의 재침 소문과 토적들의 횡행 등이 전쟁 후유증으로 약간 언급되고, 수차에 걸쳐 자신의 선대 족보와 이를 확보하는 과정을 신축년까지 자세히 언급한 정도가 특징일 것이다.

명군 참전을 계기로 건립된 관우 사당 동묘(동관왕묘) 내부(서울 동대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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