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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Ⅱ 『쇄미록』 저자 오희문의 가계

by 헬나이트 2020.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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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미록』을 저술한 오희문 선생은 해주오씨 시조로부터 13세손이며, 석성 현감 오옥정의 손자다. 장성 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오경민의 아들이다. 어머니 고성 남씨와의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39년(중종34) 윤 7월 25일 충북 영동의 황간 외가에서 출생하여 10여 세 때까지 외사촌들과 함께 자랐다.

황간의 국립교육 중심지였던 황간향교 명륜당

저자 오희문은 17세 무렵에 연안 이씨와 혼인하여 조선 초기 명신 이석형의 현손인 이정수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아호는 비연이다. 결혼 후에는 주로 성균관 북쪽에 위치한 처가에서 처남들과 함께 지냈다. 오희문 대에 이르러 친가는 물론 외가와 매가 및 처가 일족들이 서울에 모여 살면서 가계가 더욱 번성해졌다. 처가의 도움을 받아 노비를 거느리며 규모 있는 양반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는 장남 윤겸을 비롯하여 43녀를 두었다.

오희문 일가가 살았던 성균관 부근 지도('한양도' 부분, 1902)

오희문은 그의 외숙인 남지원이 보성 군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지방유림으로 명망이 높던 임희중에게 수학한 것을 비롯해 여러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장자 오윤겸이 높은 관직에 오르자 그로 인해 선공감 감역을 지낸 것이 전부였다.

오윤겸은 1581년(선조14) 대학자인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릉 참봉이 되었다. 오희문의 세 아들은 모두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조선의 청백리로 이름이 높은 오윤겸은 부친 오희문과 스승 성혼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희문의 장자 윤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스승 성혼 초상(부분)

오희문 선생의 가계가 더욱 번창하게 된 계기는 장남 윤겸이 강원도 평강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중에 별시 문과에 급제한 것이었다. 선생이 62세가 되던 1600년(선조33) 장남 윤겸은 세자시강원문학과 홍문관부수찬으로 출사하여 이듬해는 홍문관수찬을 거쳐 이조좌랑과 홍문관부교리를 역임하면서 전도유망한 인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희문의 장자 영의정 오윤겸의 필적

그 후로 오윤겸은 안주 목사, 동래 부사 등 외직을 거쳐 호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했다. 내직에 근무하던 오윤겸이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으나, 연로한 부친을 봉양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 목사로 자리를 옮기던 1613년(광해군5) 12월 오희문은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추증) 영의정 오희문의 묘소(경기 용인 처인구, 향토유적 제34호)

그러나 오희문은 사후에 영의정으로 증직되는 영예를 누렸다. 장남 오윤겸이 사헌부 대사헌, 형조·예조·이조판서를 거쳐 1626년(인조4)에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 1628년 11월 70세에 영의정이 되는 등 국정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다.

오희문의 장자 오윤겸에게 내린 국왕 교지(인조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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