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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Ⅰ 오희문 『쇄미록』은 어떤 책인가

by 헬나이트 2020.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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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미록』은 조선 중기 사대부 출신 선비 오희문 선생의 저작이다. 그의 가족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직접 체험하거나 보고 들은 각종 전시 상황들을 기록한 개인 일기책이다. 서울을 떠나서 남쪽 지방으로 여행하던 도중에 전란을 당했다.

당시 54세 오희문은 전형적인 서울 양반이었다. 75세 어머니를 모시고 4남 3녀와 그에 딸린 직계가족들을 거느리고 서울 중심가에 살았다. 오희문 선생이 남행길에 오른 것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해인 1591년 11월 27일이다. 충청도 황간에 사는 외숙과 전라도 장수, 영암의 친지들 목천과 연기의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지우들을 방문하며, 성주와 장흥 등지에 있는 외거노비들의 신공을 거두기 위한 다목적 여행길이었다.

목천-연기를 거쳐 장수에서 설날을 보내고 1592년 봄부터 다시 영동·황간·금릉-무주-장수-영암 등지를 돌았다.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 온 4월 13일에는 전라도 장수에 있었다. 전란 소식은 3일 후인 16일에 들었다. 이로부터 『쇄미록』이 기록이 시작된다.

쇄미록 한장본(보물 제 1096호)

이 무렵 저자 오희문은 장수 현감으로 재직 중인 처남 이윤의 집에 있었다. 6월 하순경 왜적이 전라도 경계로 쳐들어오자 26일에는 처남 이윤 가족과 함께 장수 동쪽 영취산 석천사로 피신했다. 장수 동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현감 이윤이 매일 전령을 보내 전황을 알려 주었기 때문에 비교적 생생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전라도 장수군 동쪽 영취산 부근 지형

오희문은 10월 중순경에 충청도 홍주(홍성)에서 가족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듬해(1593) 6월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시 흩어져야 했다. 이때 가족 일부를 데리고 충청도 임천에 정착하고, 1594년부터는 농경생활로 3년을 지냈다. 1596년 말에 임천을 떠나 서울에서 가족들과 합류했다. 1597년 정유년 2월 중순에는 큰아들 오윤겸이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는 강원도 평강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가족들을 먼저 상경시키고 자신은 1601년 2월 하순에 서울로 돌아왔다.

오희문이 이사했던 강원도 평강군 부근 지도

따라서 『쇄미록』은 저자 오희문 선생이 왜란 발발 직전인 1591년 11월 27일부터 서울에 돌아오기까지 왜란과 재란의 전체 과정은 물론 전란 직후 시기를 망라하는 9년 3개월의 피난 경험을 중심으로 기록한 일기다. 전쟁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역사적 사실은 물론 자신이 겪은 고초를 중심으로 기술한 특징이 있다.

오희문의 쇄미록 원고 초본(국립진주박물관)

일기책의 제목을 『쇄미록』이라 한 까닭도 『시전(시경)』 모구장 '자잘하며 보잘것없는 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로다'라는 뜻의 瑣兮尾兮 遊離之子(쇄혜미혜 유리지자)에서 그 '쇄미'를 빌려 온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동안의 일기이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자 “종이가 다해 일기를 그만 쓴다. 또한 서울에 도착했으니 유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붓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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