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출범한 조선은 건국 초기에 왜구의 소굴을 소탕할 원정군을 편성했다. 고려말기부터 서남해안에 출몰해 극성을 부리던 왜구는 이미 사회 혼란의 주범이 되고 있었다. 조선 건국자들은 고려 멸망이 왜구의 침공으로 인한 사회 혼란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여진이나 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교린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국시와도 같은 대외 정책이 위협을 받게 되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앞서 13세기 후반 고려군이 원나라의 일본 침공에 파병한 것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원정군을 편성해 1419년 왜구의 소굴 대마도로 쳐들어갔다.
이른바 ‘기해동정’으로 불리는 조선군의 출병은 1419년 5월에 왜선 40여 척이 충청도 해안에 쳐들어와 약탈․방화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왜구 선단은 명(明)나라로 향하던 도중에 뱃머리를 돌려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충남 서천군 도둔리) 일대로 쳐들어왔다. 접전을 벌이던 충청 수영의 병선 7척이 불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일부 왜구 선단은 황해도 해주 쪽으로 올라가 수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약탈 방화를 자행했다.
조선은 왜구 선단이 대마도로 복귀하기 전에 대마도를 기습하기로 했다. 정벌 계획이 신속히 추진되어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총사령관이 되었다. 중․좌․우군으로 편성된 조선군은 6월 중순 거제도 앞바다에 집결했다. 전선 227척과 병력 17,000여 명이었다.
6월 19일에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周原防浦)를 떠나 대마도로 직행한 조선군은 6월 20일 정오 무렵부터 상륙전을 전개했다. 투항에 불응하는 왜구 선박 140여 척을 납포했다. 그 중에서 20척을 압류하고 가옥 2,000여 호와 함께 불태웠다. 왜구 우두머리 114명을 사살하고 21명을 생포했다. 왜구들에게 끌려와 억류 중인 조선인 8명과 중국인 남녀 140여 명도 구출해 냈다.
그러나 6월 29일에는 왜구들의 매복 작전에 말려들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왜구 복병을 만나 특히 좌군 절제사 박실(朴實) 부대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은 목책을 설치하고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대마도 왜구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광경이었다. 조선군이 대마도에 장기 주둔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줄 수 있었다. 대마도 도주는 왜구를 단속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화해를 요청해왔다.
당시 조선군이 처한 상황도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여름 장마와 태풍이 몰려오면 어떤 피해를 입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 조선군 수뇌부는 대마 도주의 화해 제의를 받아들이고,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했다.
조선군이 대마도에서 철수한 직후에도 재출병 계획이 추진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제도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인해 전선이 파괴되자 중지하고 말았다. 태종 말년에 추진된 대마도 출병은 외부의 요청이 없는 상황에서 조선군 단독으로 계획하고 추진했던 해외 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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