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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2)-원의 일본 침공에 고려군 파병

by 헬나이트 2020.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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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30여년 지속된 몽골과의 적대관계를 1259년 청산했다. 군신관계가 수립되자 몽골의 강력한 정치적 간섭이 시작되었다. 몽골은 1271년부터 원(元)으로 국호를 바꾸고 세계 대제국 건설의 야망을 키웠다.

원나라는 평화적 방법으로 일본과 관계 설정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무력적 방법으로 전환하였다. 원정군에 고려군의 파병을 요구해왔다. 고려는 원의 일본 원정 기지로 전락했다. 주권을 제약받고 있던 고려로서는 원정을 준비하고 군대를 파병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의 기병전투 양상

심지어 원나라 군대의 전쟁 준비도 고려 땅에서 이루어졌다. 전선 수백 척과 각종 장비 및 군량을 고려가 준비했다. 1274년 1차 원정에 전선 900척을 동원하고 고려 군민 15000여 명이 직접 참전했다.

이른바 고려-원 연합군은 몽한군(蒙漢軍:몽골족+한족) 25,000 명과 고려군 8,000명으로 편성되었다. 전선 900척에 나눠 타고 1274년 10월 현 경남 마산의 합포를 떠나 대마도로 향했다. 도독사 김방경(金方慶) 장군이 고려군을 지휘했다.

제1차 원정은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1281년 2차 연합군에 고려군 10,000명이 참전했다. 고려군은 전선 900척과 몽한군 30,000여 명이 필요한 군량 및 전쟁 물자를 함께 준비하는 고통을 겪었다.

당시 중국 대륙의 송(宋)나라가 멸망한 후로 편입된 강남군 100,000명이 크고작은 전함 3,500척에 분승하여 참전했다. 2차 원정도 실패로 끝났다. 강남군 도착이 지연되어 작전에 차질이 생기고, 일본군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예기치 못한 태풍의 영향이 실패 원인이었다.

연합군 철포공격을 받은 스에나가(몽고습래회사, 13C, 일본)

두 차례 일본 원정에 고려는 연인원 40,000여 명을 파병했다. 준비 과정에서는 그 몇 배의 인력과 물자가 들어갔다. 국내에는 농업에 차질이 생겨 식량난이 가중되었다. 이후로도 원나라는 일본 침공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결국 세조 쿠빌라이가 죽는 1294년 이후로 포기했다. 고려는 20여년 계속되던 전쟁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원나라 부마국 고려에 강요된 파병의 역사는 국력을 고갈시켜 왕조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 원정의 결과로 야기된 왜구들의 빈번한 침입도 말기적 현상을 심화시키는 외적 요인이었다. 1280년에 설치한 정동행성은 원정군 최고 기관에서 내정 간섭 기관으로 변질되어 장기간 존속되었다. 원나라에 의해 강요된 파병으로 인해 고려는 참담한 고통을 겪었다.

그 반면에 일본은 여원연합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준 태풍 때문에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태풍이 자신들을 구했다는 뜻에서 ‘신풍(神風:가미카제)’이라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대외 저항정신의 표상으로 삼았다.

14세기 중반, 원의 요청에 따라 또 한 차례 중국 산동성에 출병한 사례가 있었다. 원은 산동성 고우에서 일어난 장사성의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지원군을 요청했고, 1354년(공민왕 3) 고려군 2,000명이 참전했다.

대호군 최영(崔瑩)을 사령관으로 삼고 유탁·염제신 등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대승을 거두고 귀국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1367년(공민왕 16) 원이 멸망하고 이듬해 한족의 명나라가 들어섰기 때문에 빛바랜 출병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30여 년 후 고려 왕조도 멸망하고 조선 왕조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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