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교린정책 대상인 여진족은 15세기 후반 무렵 건주(建州)여진․해서(海西)여진․야인(野人)여진으로 구분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 대륙에 걸쳐 수렵․어로 및 농경에 종사하면서 통합과 분열을 반복해왔다.
야인여진은 파저강(일명 동가강)과 두만강 유역의 우랑카이(兀良哈:오랑캐)부족, 함경도 회령 일대의 우도리(오도리)부족, 목단강․수분하 일대의 우디캐 부족으로 크게 나누어져 살고 있었다. 조선과 가장 근접한 지역에서 복종과 배신을 반복하는 이들을 포함한 여진부족 전체를 조선은 ‘야인’으로 불렀다.
그 중에서도 조선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부족은 주로 우도리족과 우디캐족이었다. 이들은 때때로 조선의 대여진 정책에 반발하여 조직적인 침공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이 강온 양면정책을 구사하다가 강경정책으로 채택한 것이 15세기 후반의 정벌군 파병이었다.
당시 조선은 1460년(세조 6) 함길도 도체찰사 신숙주(申叔舟)가 보병과 기병 5,000여 명으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한 지 수년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은 여진족이 요동 침공을 단행할 것이라는 첩보를 1467년(세조 13) 2월에 입수했다. 명나라와 대응전략을 논의하고 있는 가운데, 그해 8월 명나라 요동도사가 출병을 요청해 오고 이어 9월에는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 파병을 요청해왔다.
이에 조선은 주장 강순(康純)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좌상대장 어유소(魚有沼)와 우상대장 남이(南怡)를 부장으로 임명했다. 정벌군은 변경도시인 만포에서 압록강을 건너 파저강으로 남안으로 쳐들어갔다.
여진 추장 이만주(李滿住)와 우두머리급 24명을 포함한 300여 명과 우마 230여 마리를 참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여진족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성과가 있었으나 명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비밀리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파병 규모가 1만여 명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은 1479년(성종 10)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윤10월에는 반대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다. 앞서 여진 정벌군을 지휘했던 어유소 장군을 삼도 도체찰사로 삼아 1만여 명이 출전했으나 압록강이 얼지 않아서 도하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다시 출병 문제가 논의되자 파병 불가론이 일어났으나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이 도원수가 되고, 평안도 절도사 김교(金嶠)가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국경수비대 정예병 1천 명이 11월에 출병하여 별다른 피해 없이 12월에 돌아왔다.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으나 국내 반대 여론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양측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형식적인 출병으로 막을 내렸다.
'역사와 이야기 > 전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6)-청의 나선 정벌에 조선 조총수 파병 (0) | 2020.05.12 |
---|---|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5)-명의 후금 정벌군에 조선군 파병 (0) | 2020.05.06 |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3)-조선의 대마도 왜구 정벌군 파병 (0) | 2020.05.01 |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2)-원의 일본 침공에 고려군 파병 (0) | 2020.04.29 |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1)-해외 파병 역사의 이해 (0) | 2020.04.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