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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5)-경상우수사 이순신과 충무공 이순신 명량해전 이후로 수군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이순신은 경상우수사가 되어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돌아왔다. 1598년 9월 하순부터 장기간 전개된 순천 왜교성(倭橋城) 전투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조·명 연합작전에 참전했다. 이때 경상우수사 이순신의 지위는 통제사 이순신 다음가는 부사령관 격이었다. 왜란 발발 초기부터 의기투합 연전연승한 두 지휘관이 다시 수군을 이끌게 된 것이다. 군사들도 사기가 충천했다. 반면에 왜군은 더욱 위축되어 수륙 양면 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무렵 왜군 진영에는 본국으로 철수하라는 밀명이 하달되었다.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은 명군 도독 진린(陳璘)을 매수하여 퇴로를 확보하려 했다. 통제사 이순신은 진린의 지시를 거부했다. 결국 왜군은 사천 남쪽 창선.. 2020. 4. 22.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4)-충청수사 이순신과 통제사 이순신 1593년 8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간의 전공을 인정받아 전라․충청․경상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방답첨사 이순신은 한직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결국 해전의 공로가 인정되어 충청수사로 돌아왔다. 1594년 9월 말 제1차 장문포 해전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오른팔이 되어 다시 전장으로 나갔다. 이 무렵 왜군들도 수차례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의 전술을 상당히 간파하고 있었다. 해전 양상도 달라졌다. 왜군은 불리하면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육군과 양면 협공을 하지 않으면 소탕할 수가 없게 되었다. 육지로 도주한 적선 2척을 소각시키는 전과에 만족할 때도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10월 초순에 벌어졌던 영등포 해전․제2차 장문포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유년(1597.. 2020. 4. 20.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3)-통합 함대의 전부장 이순신 왜군은 5월 초순에 수군의 연이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탐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제2차 출전을 서둘렀다.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은 특히 당항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함대 사령관 이순신에게 '산으로 도주한 적이 날이 밝으면 남겨 둔 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할 것이므로 포구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예측대로 6일 새벽에 1백여 명이 승선한 적선이 빠져 나오자 이순신은 근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집중 공격했다. 적장을 포함한 1백여 명을 모조리 수장시켰다. 당시 적선에 실려 있던 주요 문서와 많은 장비들을 노획했다. 통합함대 사령관 이순신은 전투결과보고서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방답첨사 이순신이 전개한 매복전.. 2020. 4. 17.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2)-전라좌수영 함대의 중위장 이순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부산 지역으로 왜군이 쳐들어오자 경상좌수사와 경상우수사가 모두 피신해 버렸다. 무방비나 다름없는 남해안에 왜군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상륙했다.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결행에 들어갔다. 이순신은 5월 5일 거제도 서쪽 미륵도의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元均)의 경상우수영 수군과 합류하기로 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도 참전을 종용했다. 전라좌수영 수군은 주력 전선인 대형 판옥선 24척과 중형 협선(挾船) 15척, 소형 쾌속선인 포작선(鮑作船) 46척으로 함대를 편성했다. 5월 4일 새벽 출전 깃발을 높이 달고 여수항을 떠났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중위장으로서 함대의 주축이 되어 출전했다. 전라좌수영 함대가 당포 앞바다.. 2020. 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