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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3)-조선의 대마도 왜구 정벌군 파병 1392년 출범한 조선은 건국 초기에 왜구의 소굴을 소탕할 원정군을 편성했다. 고려말기부터 서남해안에 출몰해 극성을 부리던 왜구는 이미 사회 혼란의 주범이 되고 있었다. 조선 건국자들은 고려 멸망이 왜구의 침공으로 인한 사회 혼란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여진이나 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교린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국시와도 같은 대외 정책이 위협을 받게 되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앞서 13세기 후반 고려군이 원나라의 일본 침공에 파병한 것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원정군을 편성해 1419년 왜구의 소굴 대마도로 쳐들어갔다. 이른바 ‘기해동정’으로 불리는 조선군의 출병은 1419년 5월에 왜선 40여 척이 충청도 해안에 쳐들어와 약탈․방화한 사건이 계기가.. 2020. 5. 1.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2)-원의 일본 침공에 고려군 파병 고려는 30여년 지속된 몽골과의 적대관계를 1259년 청산했다. 군신관계가 수립되자 몽골의 강력한 정치적 간섭이 시작되었다. 몽골은 1271년부터 원(元)으로 국호를 바꾸고 세계 대제국 건설의 야망을 키웠다. 원나라는 평화적 방법으로 일본과 관계 설정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무력적 방법으로 전환하였다. 원정군에 고려군의 파병을 요구해왔다. 고려는 원의 일본 원정 기지로 전락했다. 주권을 제약받고 있던 고려로서는 원정을 준비하고 군대를 파병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원나라 군대의 전쟁 준비도 고려 땅에서 이루어졌다. 전선 수백 척과 각종 장비 및 군량을 고려가 준비했다. 1274년 1차 원정에 전선 900척을 동원하고 고려 군민 15000여 명이 직접 참전했다. 이른바 고려-원 연합군은 몽한군(蒙漢軍:몽골족.. 2020. 4. 29.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1)-해외 파병 역사의 이해 우리 역사에서 대외파병은 ‘파병’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범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다른 나라와 연합작전을 염두에 둔 파병이라면 13세기 후반 고려가 원(元)나라 몽골군과 일본 원정에 출병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13세기 이후로 21세기 초반에 접어든 오늘날까지 7백여 년의 파병 역사가 있다. 그러나 시대적 환경과 군사적 상황은 제각기 달랐다. 자위적 수단으로 출병하는 경우는 연합군을 편성하기 보다는 단독으로 작전을 벌였다. 주변 강국의 요청에 따라 무리한 출병을 단행한 경우는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파병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자주권이 크게 제약되어 일방적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례가 많았다. 불가피한 파병은 전장에 출동하는 군사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많은 고통이 뒤따.. 2020. 4. 27.
충무공 이순신의 분신 무의공 이순신(6)-전라병영에서 순직한 무의공 이순신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이순신은 포도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서 충청수사를 잠시 맡았다가 1601년 황해병사로 나갔다. 이때 도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은 이순신을 수군에 근무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순신 같이 수전(水戰)에 능한 장수를 육진(陸陣)에 배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그 후 선조는 수원 부사와 경상우병사를 거친 다음에야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 요직을 거치기는 했으나 순탄한 관직생활은 아니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로 임해군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관직을 떠난 적도 있었다. 혐의가 풀리면서 1610년 전라도 육군 최고 사령관인 전라병사로 부임했다. 그 해 9월 ‘장례를 검소하게 할 것이며, 절대로 병영의 군수품을 낭비하지 말라’고 유언한 후 강진의 병.. 2020.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