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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6)-청의 나선 정벌에 조선 조총수 파병

by 헬나이트 2020.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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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명과 후금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중립을 유지한 결과 국정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23년에 광해군을 밀어내고 집권한 인조는 달랐다. 그는 친명배금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양국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급기야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군신맹약으로 치욕적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조선은 절치부심하면서 비밀리에 북벌 계획을 세우고 군비를 확충해나갔다. 특히 효종은 심양에서 인질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즉위했기 때문에 복수심이 남달랐다. 조선에서 북벌의지가 고조되던 17세기 후반에 ‘나선(羅禪)’으로 불리는 러시아 세력이 청국의 흑룡강 유역으로 밀려왔다.

러시아는 흑룡강을 ‘아무르강’이라고 불렀다. 러시아 원정대는 1651년(효종 2)에 아무르강 상류지역 서안의 야크사(Yaksa)에 알바진(Albazin)성을 쌓고, 이듬해에는 흑룡강 하구 하바롭스크(Khabarovsk) 일대에 성채를 구축했다. 적극적으로 동방진출을 시도하자 긴장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코사크(카작) 기병대

청은 러시아 원정대의 군사력이 증강되기 이전에 후환을 없애려고 했다. 이때 조선이 조총수 파병을 요청받았다. 1차 파병은 1654년 5월 함경도 북우후 변급(邊及)을 사령관으로 삼아 그 지역 정예 조총수 100명을 포함한 총 152명이 선발되었다. 수도 한양에서 군사들이 출동했다는 인터넷 지도들은 모두 잘 못 된 것이다.

제1차 나선정벌군 편성(『조선의 대외정벌』, 363쪽, 알마출판사, 2015)

조선군은 도중에 청군 900여 명과 합류하여 흑룡강(아무르강) 중하류 연안에서 러시아 원정대와 싸웠다. 매복 전술로 러시아 원정대 400여 명을 기습하여 청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리고 80여 일 만인 그해 8월에 전원이 무사히 돌아왔다.

제1차 나선정벌 상황도(『조선의 대외정벌』, 371쪽, 알마출판사, 2015)
아무르강의 섬과 유람선 

그 후 청군은 1654년과 1655년에 러시아 원정군에 패전하자 2차 파병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1658년 5월에 함경도 병마우후 신류(申瀏)를 사령관으로 삼아 조총수 200명을 포함한 265명과 3개월분 군량을 가지고 지원에 나섰다.

제2차 나선정벌군 편성(『조선의 대외정벌』, 390쪽, 알마출판사, 2015)

6월 초순에 영고탑에서 청군과 합류했다. 목단강과 송화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다가 7월 초순 흑룡강과의 합류점 부근에서 러시아 원정대와 접전을 벌였다. 역시 2차 파병부대도 함경도 현지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국경을 넘어갔다. 인터넷에 떠도는 지도 중에서 한양 도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표기된 지도는 잘 못 된 것이다. 따라서 함경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수정돼야 한다.

제2차 나선정벌 상황도(『조선의 대외정벌』, 412쪽, 알마출판사, 2015)

조선의 제2차 정벌군 신유 사령관은 소형 선박으로 러시아 원정대의 사격을 유도하여 적의 실탄 소모시켰다. 이어 적선에 불화살을 집중하여 대소 전함 300여 척을 불태웠다. 조선군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러시아 원정대는 사령관 스테파노프(Stephanov)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조선군은 5월 하순부터 9월 하순까지 약 4개월 동안 출병하면서 실제 전투기간은 4~5일이었다.

신류장군 출병일기 번역본 표지

조선군은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조총수의 전투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은 청의 주변 정세와 청군의 형편없는 전투력을 탐지했다. 따라서 북벌의 선봉이 될 장병들의 전력을 비교 평가하는 부수적인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북벌계획은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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