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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8)-임오군란도 비켜간 청백리 ‘양대장’ 집

by 헬나이트 2020.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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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양헌수는 한성부 우윤(정3품)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히려 무거웠다. 서구 열강의 재침이 두려워 관직을 내놓고 낙향하는 관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양헌수는 “우리 집안은 국가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유사시에는 나라에 몸을 바쳐야 하는데 어찌 한 발자국인들 떠날 수 있겠는가.” 라고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

양헌수는 용양위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진무영 중군, 어영청 중군, 금위영 중군,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사옹원제조 등 요직을 거쳤다. 1869년 12월에는 황해도 육군의 최고사령관인 황해병사(종2품)로 부임하여 외직으로 나갔다.

자신의 조부 양완(梁垸)이 경상좌수사를 역임했고, 또 증조부 양세현(梁世絢)이 앞서 황해병사를 역임한 뒤였다. 증조부가 거쳐 간 황해 병사의 중책을 증손인 자신이 맡게 되었을 때, 무인 양헌수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남 다른 인연을 가지고 부임한 황해 병사 양헌수는 선정을 베풀었다. 병사의 임기가 만료되었음에도 황해도 군․민들은 중앙 정부에 요청하여 1년 연임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양헌수는 1871년에 발발한 신미양요를 황해도에서 소문으로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양헌수는 58세 때인 1873년(고종10)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왔다. 용양위호군 겸 동지의금부사를 비롯하여 어영대장, 삼군부사 겸 지훈련원사, 좌변포도대장 등과 같은 요직을 역임하면서, 1873년 8월에는 정시(庭試:국가의 경사를 축하하여 궁궐에서 실시한 임시 과거, 일명 경과)에 수석 시험관인 상시관이 되는 명예를 누리기도 한다. 그 후 1876년에도 시험관이 되었는데, 문무겸전한 양헌수의 개인적 특성을 인정한 사례다.

그러다가 1875년 2월에는 60세에 형조판서의 중임을 맡으면서 금위대장을 겸직했다. 이어서 오위도총부 도총관, 지중추부사 겸 지삼군부사의 요직을 거처 1880년에는 65세로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변란을 당하였는데, 이때 하급 군인들로부터도 각별한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훈련중인 신식군대

1881년에 영선사로 청의 천진에 파견되었던 인물로 잘 알려진 운양 김윤식(金允植)이 쓴 양헌수 행장(行狀:고인의 행적을 기록한 글)에 의하면, 분노한 난군들이 고위 인사들의 집을 습격하다가 급기야 양헌수 대장의 집에 들이닥쳤다. 난군의 선두에서 누군가  ‘여기는 양대장의 집이다’라고 외치자 진로를 바꾸어 물러갔다고 한다. 당시 군사들의 지지와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다.

1884년 69세인 양헌수는 갑신정변의 혼란을 겪고, 이듬해에는 정2품의 정헌대부가 되었다. 이어 72세 때인 1887년 12월에는 춘천부 유수 겸 독련사(督鍊使)에 제수되었다. 그는 노환을 이유로 사양했다. 1884년 갑신정변, 1885년 영국 함대의 거문도(巨文島:현 전남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강점,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같은 여러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고 탄식했다.

양헌수 대장은 1888년 11월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생전에 ‘나는 본래 가난한 선비다. 내 죽으면 반드시 무명(木綿) 옷으로 염을 하라.’고 자손들에게 당부했다. 고인의 뜻에 따라 1889년 2월 과천 남면 부곡에 장사지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 정부는 양헌수의 우국충절을 기리며 시호를 ‘충장(忠莊)’이라 하였다.

충장공 양헌수 묘소(경기 양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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