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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1)-문무겸전한 양헌수 선대 혈통

by 헬나이트 2020.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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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양헌수 대장 초상화                                          무과시험을 준비하던 택승정 활터(경기 양평군 광탄리) 

 양헌수(梁憲洙:1816~1888)는 19세기 중반을 전후해서 활약한 조선 말기의 대표적 무인이다. 그의 선대 양우량(梁友諒)이 신라로부터 남원부백(南原府伯)의 작위를 받은 것을 계기로 하여 남원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제주도 삼성혈(三姓穴)에는 梁씨를 비롯해 고(高)씨와 부(夫)씨가 있어서 제주 양씨로도 불린다.

조선조에 명성을 날린 인물로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1415~1482)가 대표적이다.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6조에 걸쳐 이조판서․사헌부 대사헌․홍문관 대제학 등과 같은 요직을 두루 거친 명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양성지의 저작인 『눌재집』은 보통 문신들의 문집과는 달리 국방과 관련된 주장을 많이 담고 있다. 문묘(文廟)에 상응하는 무묘(武廟)를 세우고 무풍(武風)을 장려할 것을 주장한 것은 문무쌍전의 중요성을 간파한데서 나온 것이다. 일찍이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그의 주장은 특히 양헌수 대를 전후하여 여러 후손들이 절도사를 역임함으로써 더욱 돋보인다.

양헌수의 증조부인 양세현(梁世絢)은 제주 목사와 황해도 육군의 최고 사령관인 병마절도사(종2품)를 역임하고, 조부 양완(梁垸)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정3품)를 지냈다.

증조부 양세현과 증손 양헌수 목사 기념비(제주도 삼성혈 경내)

 양완은 사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기도 하였는데, 생전에 병서를 탐독하면서 우리나라의 지형과 전술에 적합한 진법을 개발하기 위해 몰두한 인물이다. 그 결과 중국의 전통 병서인 『악기경(握奇經)』의 이론 체계를 바탕으로 하면서 여기에 ‘도설’을 첨부한 『악기도설(握奇圖說)』이라는 진법서를 남겼다. 즉 ‘조선적 악기경’을 후세에 남긴 것이다.

'악기도설' 국역본과 내용

양헌수의 부친 양종임(梁鍾任)은 진사 양규(梁珪)의 아들로서 양완의 양자로 들어가 파평 윤씨 윤원대(尹遠大)의 따님과 혼인하여 양헌수를 낳았다. 그 후 음직(蔭職)으로 무관직인 부사정(종7품)의 벼슬을 받았다. 사후에는 의정부 좌참찬(정2품)에 추증되었다.

양종임은 부친인 양완이나 자신의 아들 양헌수와 같이 무인으로서의 명성을 날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는 것은, 그 아들 양헌수가 국가적 위기 극복에 큰 전공을 세우고, 병마절도사어영대장좌포장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 등 주요 관직들을 역임하면서 국정에 기여한 공로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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