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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5)-철저한 지형정찰과 양헌수의 전략 판단

by 헬나이트 2020.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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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 천총 양헌수는 10월 16일 자정 무렵 도성을 출발하여 17일 아침 한강 양화진에서 흥선대원군의 격려를 받으며 강화도로 떠났다. 18일 해질 무렵에 통진에 도착하여 임시 둔지를 설치했다. 이어서 중군 이용희의 본대가 도착한 후 출동 준비를 갖추었으나 정작 타고 갈 선박이 없었다.

이때 양헌수는 프랑스군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대표 회담을 제의하는 서한을 직접 작성하여 프랑스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삼정승을 처벌하고 수호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천총 양헌수의 판단은 단호했다.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0월 19일 지리에 밝은 인근 주민과 함께 통진 뒷산에 올라가 정찰을 실시했다. 프랑스 함대의 전체적 규모와 군세를 파악한 후 매복조와 정찰조를 활용하는 복안을 세웠다.

통진 뒷산 북쪽 수현리 고개마루 좌우 측에 병력 1초를 매복시켰다. 민간인으로 변장한 정찰조를 강화도에 투입했다. 이튿날(23일) 정찰보고를 토대로 수현리의 매복지점 전방 포내리 부근에 포수 20명을 전진 배치시켰다. 프랑스군의 침투가 예상되는 제2 접근로인 덕포 나루에도 24명을 배치했다.

덕포진 기념관(경기 김포시)

10월 18일 통진부에 도착한 이래 10여 일이 지났다. 조정에서 보내 준 경강선 16척이 조강리에 도착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강화 해협으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 어민들의 소형 선박을 징발하기로 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양헌수는 11월 1일(음력 9.24)에 소형 어선 5척을 구해 덕포(德浦) 나루에 숨겨두었다. 별군관 이현규 등에게 덕포 일대의 지형을 정찰하도록 한 후 11월 5일에는 직접 덕포로 가서 정찰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리고 확인 정찰을 실시했다.

이때 양헌수는 건너편 강화도에 고성(古城)을 발견했다. 안내인을 통해 정족산성이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양헌수는 중요한 전략거점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통진부에 돌아오는 즉시 중군 이용희에게 포수 500명과 강화 해협을 극비리에 도하한 후 정족산성에 거점을 확보하는 복안을 건의했다.

그의 계획대로 총 500여 명이 1인당 2일분 식량을 면포대 250여 개에 담아 2인 1조로 휴대했다. 개인 비상식량으로 인절미도 지급했다. 이 같은 치밀한 준비상황은 그가 남긴 『병인일기』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정족산성(일명 삼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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