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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4)-국가위기를 두 어깨에 진 천총 양헌수

by 헬나이트 2020.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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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866년 천주교 신자 8천 여 명과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한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인해 프랑스 함대의 침공을 받았다. 프랑스 극동함대는 한강 하구의 염창항(鹽倉項,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설치된 차단선을 뚫고 서강 입구까지 들어왔다가 10월 3일 산둥반도의 지부항으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군은 청국과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한 해군 1천 여 명을 군함 7척에 싣고 10월 11일 로즈(Rose) 사령관의 지휘 하에 지부항을 떠났다. 이튿날(12일) 저녁 6시경 서해안 남양만 앞바다 입파도 인근에 정박했다. 14일에는 강화해협을 30㎞나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 동북단 갑곶진 앞 해상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조선군과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날 강화 수로 양안에 있는 돈대 및 포대를 병인양요 때의 격전지로 소개하는 것은 착오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5년 후인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비로소 미국 함대와 포격전을 벌였다.

프랑스군 참전장교 쥐베르(Jean Henri Zuber)가 스케치한 강화성과 유수부 부근(카메라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요 상황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러나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들은 카메라로 사진을 남겼다)

조선군과 프랑스군의 무력 충돌은 강화성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10월 16일 아침에 강화성이 프랑스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프랑스군은 강화 유수부를 수색하여 은괴(銀塊) 18상자와 각종 군수품, 주요 문서 및 서적들을 휩쓸어 군함에 실었다. 은괴는 당시 프랑스 화폐로 20만 프랑에 해당했다. 근래에 프랑스 정부와 반환 교섭이 전개되다가 중지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고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아온 의궤와 같은 외규장각(外奎章閣) 도서들도 이때 약탈당한 것이다.

복원된 외규장각

조선 조정은 강화성 동문이 돌파되던 10월 15일,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한강변 일대에 대한 방어대책을 수립하고, 이튿날 16일에는 작전사령부로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했다. 훈련대장 이경하가 기보연해도순무사(畿輔沿海都巡撫使)에 임명되고, 훈련도감 중군 이용희가 기보연해 순무 중군을 겸임하였다. 이때 양헌수는 순무 천총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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