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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격동의 19세기 조선(12) - 조선 조정이 수립한 비상대책

by 헬나이트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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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의 수중에 떨어진 강화 유수부를 탈환하기 위한 대책은 10월 18일 중신회의에서 논의되었다. 각 도에서 모집한 의병을 서울로 집결시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소모사를 전국적으로 파견하는 계획도 세웠다.

이 무렵 통진부도 프랑스 군에게 무혈로 점령당했다. 통진부의 주요 관수품이 약탈당하고 관아가 모두 불탔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 조정이 처음부터 프랑스 함대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함대가 조선 영해를 침범하여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오자 수도 서울에 접근하기 전에 대화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10월 15일 강화성 동문이 프랑스 함대의 침공에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에 무의미해졌다. 이에 조선 조정은 훈련대장 이경하와 총융사 신관호(申櫶으로 개명) 등이 한강변 일대의 방어계획을 수립하고, 총융 중군 이원희가 이에 협력하도록 조치했다.

신관호(신헌으로 개명) 사진(부분)

그리고 이튿날인 10월 16일에는 창덕궁 중희당에서 확대 중신 회의를 개최하고 종합 대책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기보연해 순무사 이경하는 국왕 고종으로부터 상방검과 갑옷을 하사받고 경기지역의 군·정을 지휘하게 되었다. 훈련도감 중군 이용희는 기보연해 순무 중군의 직무를 겸임하며, 주교도청 양헌수는 기보연해 순무 천총(정3품 무관직)에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5군영의 하나인 금위영에 순무영이 설치된 것이다.

창덕궁 중희당

이어 훈련도감의 마군과 보군을 중심으로 하여 2천여 명을 새로 편성했다. 이들은 순무 중군 이용희와 천총 양헌수의 지휘 아래 10월 16일 자정 무렵 도성을 출발했다. 17일 아침 10시경 한강 양화 나루에 도착한 후 흥선대원군의 격려를 받으며 강화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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