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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격동의 19세기 조선(2) - 발톱을 감춘 처세의 달인, 흥선군

by 헬나이트 2020.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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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군은 철종이 재위(1850∼1863)한 19세기 후반 14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치하에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힘겹게 살았다. 당시 서울 장안의 건달패로 이름을 날리던 ‘천하장안(千河張安)’과 어울려 음주가무로 세월을 보내며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세인들이 흥선군과 어울리며 그의 수족처럼 행동하는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의 성씨를 따서 ‘천하장안(天下長安)’이라고 빗대어 부르기도 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병주 소설 원작의 19세기 조선 시대극. TV조선 드라마 광고  

안동 김씨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도가의 문전을 전전하며 몰락한 왕손의 자존심도 버린 채 손을 벌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순조(재위:1801-1834)부터 헌종·철종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집권한 안동 김씨 세력이 철종의 후계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신경이 곤두서 왕손들의 동태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궁벽한 왕손’이라는 뜻으로 ‘궁도령’이라 불리며 그들의 조롱꺼리가 되어 감시의 눈초리도 피할 수 있었다. 결코 한직이라고 할 수 없는 종친부 유사당상과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역임하면서도 권력에 무심한 것처럼 내심을 깊이 감춘 흥선군의 전략적 행동이 안동 김씨 세력을 안심시켰다.

후계자  없이 승하한 철종 어진

그러나 흥선군은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할 경우 자신의 아들을 용상에 앉히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조대비에게 접근했다. 조대비는 헌종의 어머니로서 철종 재위기간에도 왕실 최고 어른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흥선군은 조대비의 남편인 익종의 수릉을 이장하는 행사에 대전관으로 참여한 인연도 있었으며, 조대비의 심복인 친정 조카 조성하 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두 딸을 조경호와 조정구에게 각각 시집보내 풍양 조씨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익종(문조로 추증)과 조대비(신정왕후)의 합장릉 수릉(구리시 동구릉)

당시 풍양 조씨는 강력한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찾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간파한 흥선군이 왕실에서 최고 어른이며 풍양 조씨 세력의 수장격인 조대비와 암암리에 제휴하게 되었을 것이다. 비록 한미한 왕족이지만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이 무렵 흥선군은 안동 김씨 세력이 양분되어 대립 양상을 보이는 틈새를 파고들었다. 김병학·김병국 형제가 김좌근·김흥근 세력에 압도되어 열세에 처한 상황을 이용한 것이다. 김병학과 김병국은 흥선군을 끌어들임으로써 김좌근·김흥근 세력을 뛰어넘어 열세를 만회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일 이들 형제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행사하던 시기에 영의정에 오르는 등 크게 기용된 것을 보면 앞서 흥선군과 제휴한 결과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경복궁과 도성 밖 민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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