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벌봉에서 내려가다가 현절사(顯節祠)에 들렸다.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도로 건너서 산길을 100m쯤 가면 나타나는 현절사는 병자호란 이후 청의 심양에 끌려가서 순절한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충혼을 모신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과 부속건물이 몇 채 있는 소박하며 절제된 건축물이다.
삼학사 중에 한 분인 오달제(吳達濟) 선생은 임진왜란의 아픔을 절절히 기록한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 선생의 손자다. 『쇄미록』과 함께 저자인 오희문의 가계에 관해서도 장남 오윤겸과 함께 블로그에 수차례 소개했었다. 장남 오윤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명신으로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청의 칼날 아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순절한 ‘삼학사’의 한 분인 오달제 선생도 이미 역사 교과서에서 배우고 국사 시험을 통해 익숙해진 이름이다. 그러나 오달제가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의 손자며 오윤겸의 조카라는 가족 관계를 아는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오달제는 오희문 선생의 둘째 아들인 오윤해(吳允諧)의 아들이다.
오달제의 생부인 오윤해는 오윤겸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1588년(선조21)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한 후 1610년(광해군2) 별시문과의 병과에 급제했다. 1612년 여주목사로 부임하여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에 항복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로 여생을 마쳤다. 그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오달제는 자를 계휘(季輝), 호가 추담(秋潭)인데, 그의 백부 오윤겸의 아호 ‘추탄(楸灘)’과 음운이 흡사하다. 26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수석합격)한 후 홍문관 수찬을 거쳐 부교리(종5품)로 있을 때(1636년, 28세)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국왕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다.
1637년(인조15) 화의가 성립된 후 청나라가 척화론자의 처단을 요구하자 29세 청년 오달제는 척화론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결국 윤집·홍익한 선생과 함께 심양(瀋陽, 현 요녕성 선양)으로 끌려가 회유와 협박에 항거하다가 심양성 서문 밖에서 순절했다. 우리는 이 세분을 ‘삼학사’라 부른다. 오달제 선생의 시신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고국으로 돌아온 그의 유품으로 유택을 만들었다.
오달제 선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열(忠烈)공에 봉해졌다. 앞서 조부 오희문이 영의정에 추증되고, 백부 오윤겸이 영의정을 역임했으니, 오달제와 함께 3대 영의정을 배출한 가문으로 조선조의 명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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