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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1)-Ⅳ 오희문 『쇄미록』의 사료적 가치

by 헬나이트 2020.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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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선비 오희문이 쓴 『쇄미록』은 자신과 가족의 피난 사실을 기록한 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적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그 가치를 인정하여 「한국사료총서」 제14집으로 『쇄미록』 상·하 2책을 간행했다.

일기의 중간이나 책의 끝부분에는 그 시기와 관련이 깊은 국왕 및 왕세자의 교서, 의병의 격문과 통문, 명나라 참전 장수들의 패문, 각종 공문서 등이 첨부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사료총서에는 「추록」이라 하여 별도 목차를 부여했다. 저자 오희문의 12대 맏손자 오정근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자택에 보관하고 있던 수필 원본을 대본으로 하여 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용인시 공식 블로그에 소개된 오산리 해주오씨 묘역 전경(부분)

그 후로 해주오씨 추탄공파 문중에서는 1990년에 한글로 번역하고 여기에 원문을 첨부하여 상권(제1책 「임진남행일록」∼제4책 「을미일록」)과 하권(제4책 「병신일록」∼제7책 「신축일록」)으로 간행함으로써 학술적으로 한층 더 활용하기 편리하게 해 주었다.

저자 오희문이 연안 이씨와 혼인한 이후로 처가의 오랜 터전인 경기도 용인은 그 후손들의 외가로서 관련이 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의 후손들이 안정되게 정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물들을 보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쇄미록』도 이 중에 하나다.

추탄공파 종중에서 간행한 한글번역본(상.하)

조선 왕조가 개국한 후로 2백 년이 경과한 임진년(1592)부터 무술년(1598)까지 전국을 전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왜란을 당하게 되자 이와 관련한 기록물들이 적지 않게 전해오고 있다. 예컨대 류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조경남의 『난중잡록』이 잘 알려진 기록물이다.

류성용의 『징비록』 원본(국보 제132호)

이러한 기록물들은 벼슬을 한 관직자이거나 직접 의병장으로 활약한 유학자가 남긴 것이다. 그 반면에 『쇄미록』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재야 선비가 임진왜란기에 신변잡사를 중심 주제로 삼아 자유롭게 표현한 기록이라는데 특징이 있다고 할 것이다.

임진-정유재란의 전체 과정이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 장수의 처남댁에 피난하면서 보고 들은 전쟁 초기의 절박한 상황을 담아낸 것이 『쇄미록』의 가치를 더해준다. 경상도 지방이 왜적에게 유린당하는 동안에도 전라도에는 적이 쳐들어오지 못했다.

 『쇄미록』 제5책에 수록된 「정유일록」(1597) 원본

따라서 오희문은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전쟁 초기의 혼란상을 차분하게 엮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금산·무주·용담·진안·웅치·전주 등지의 전황, 전라 감사 이광의 용인전투 실패, 곽재우·김면·김천일·고경명·김덕령·조헌 등과 같은 주요 의병장들의 활약상, 침략 왜군의 잔학상은 물론 지원군으로 참전한 명군에 의한 피해 등에 이르는 각종 기록들이 돋보이는 사료로 주목받고 있다.

KBS 역사저널 '그날'(2016.4.13)에 소개된 의병과 승병 봉기 현황도

그밖에 전란으로 인해 궁핍한 일반 백성들과 천민들의 생활상을 비롯하여 이와 관련된 각종 제도 및 지배정책, 수취체제, 지방 풍속 등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으로 다양한 소재를 심도 있게 취급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사회경제사 및 민중생활사 연구 분야에서도 1차 사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 간행한 『쇄미록』 한글 번역본(2018.12)

예컨대 조선시대 용인지역 사족의 동향, 사대부 가문의 일상생활을 연구하는 주요 문헌으로 활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용인지역 해주 오씨 가문의 사회적 기반이나 상업 활동을 연구하는 기본사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1991년에 『쇄미록』이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된 것은 학술적 가치와 아울러 국가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인정한 결과일 것이다.

'조선시대학보' 제8권에 게재된 오희문 관련 학술연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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